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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절목서
대개 천지가 자리 잡고서 인간의 도리가 세워졌으며, 인간의 도리가 선 다음에
학교가 일어난 것이니, 학교 중에도 국학(國學)과 향교(鄕校)가 세워진 것은 이에
밝은 윤리로 인간됨의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저 중국의 삼대(夏·殷·周) 이래로
지금의 백대(百代) 아래에까지 만약 우리가 공자님의 가르침을 계속적으로 개발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후대의 학자들이 어찌 옳고 그름을 취사선택하며,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있겠는가? 높이고 우러르며 받들고 본받을 법은 그 만가지 중의 제일인
것이니, 나라를 경영하는 큰 법이다. 내가 천학비재(淺學匪材)로 이 군에 부임해
와서 제사를 맡아볼 때마다 군색하고 미안한 상황을 직접 몸으로 겪어보니, 어찌
마음에 절통하고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므로 이쪽저쪽으로 물어서 겨우
그 모양이나마 갖추었는데, 200량 증서를 교궁(校宮)에 주어 이자를 불려서 매년
제사 지낼 때에 우포(牛脯)나마 도우려 하니, 이것이 혹시 만 분의 일이라도 보탬이
될까 생각한 것이다. 마음은 절실하고 힘은 약하여 다만 송구하고 부끄러울 다름이다.
나누어 지급되는 이자의 내용들과 이자를 불려서 사용되는 항목을 절목책(節目冊)에
써서 공개하니, 삼가 그 뜻을 좇고 바꾸지 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정유년(1894) 사월 일 군수 서상직 쓰다.
군이 다스려지고 교궁이 생겨서 성조(聖朝)의 점점 다듬어진 크고 넓은 규모를
점차 다듬어왔으며, 어느 선비라도 옛 풍속을 숭상하지 않고 점점 야해져서 선왕의
교화의 깊은 듯을 휘날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혹시라도 우리 공자님의
타당하게 권면하는 절목을 구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드물다. 이번에 서상직씨가
이 고을에 오시면서부터 학교의 모양이 예스럽지 못함을 보고 자기의 근심을 삼아서,
청렴하고 단정하고 호랑이처럼 엄숙하시어 이에 3년이 되도록 더 심해지니 차마
더 이상 창고를 박절히 운영할 수 없어서 수백의 봉급으로 하여금 영구토록 의례에
필요한 물품들이 빠진 것을 보충하게 하니, 군수님의 군수다움은 가히 앞에 서서
성전을 우러러보니 그 정성어린 마음과 지극한 뜻이 과연 백성을 기룸의 바탕이
있지 않으면 어찌 능히 쉽게 용기를 내어 한 발작이라도 이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아아! 우리 한 지역의 선비들은 마땅히 더욱 더 절초상풍(切草常風)의 감동이 있을
편액과 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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