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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의 원종공신이자 부사를 지낸 근계(根繼)의 손자이고 성종 때
의 좌리원종공신으로 병사를 지낸 경(經)의 아들이다. 부인은 강
릉 김씨 진사 우(羽)의 딸이다. 자는 형향(馨香)이며 진사시에
합격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신원을 위해 상소를
올리고자 했으나 가로막혔고 오히려 그로 인해 남해로 유배되었
다. 그 뒤 온양의 매곡리로 들어와 살았다. 뒤에 제릉참봉(齊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우거(寓居)했다. 아들 넷을
두었으며 셋째 아들 변( )은 무과를 거쳐 첨사(僉使)에 올랐다.
<우봉이씨 족보 일부>
묘는 온양 일북면, 현재의 탕정면 갈산리에 있었으나 선문대학
교가 들어서면서 이장했다.
[63] 이단석
李端錫
<1625(인조 3년) ~ 1688(숙종 14년)>
조선 후기 숙종 때의 문신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다. 성종의 아들인 경명군(景明君) 침( , 1489~1552)
의 7세손이고, 창원군수 세의(世義)의 증손자이다. 전주 이씨 아산(염치 강청리) 입향조인 성균관장의(掌
議) 송파공 생인(生寅, 1586~1616)의 손자이고 사헌부 집의 제형(齊衡)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령 남(南)
씨 두명(斗明)의 딸이고 부인은 전의(全義) 이(李)씨 유원(有源)의 딸과 심지영(沈之瀛)의 딸이다. 자는 유
초(有初)이고 호는 쌍호당(雙壺堂)이다.
1650년(효종 1)에 증광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한 뒤 문음으로 관직에 나가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고
1660년(현종1년)에 증광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나아갔다. 1662년 정언(正言)이
되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이 때 청의 사정에 대한 문견록을 상세하게 보고
해서 왕의 포상을 받기도 했다. 1667년(현종 8) 정언 재직 당시에 시정(時政)에 대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기도 했다. 그 뒤(1669년) 다시 정언에 제수되었고 사간·집의 등을 역임했다. 1673년(현종
14)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이어 참의를 거쳐 숙종 대에 양주목사·장단부사·광주부윤·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을 맡기도 했다. 1680년(숙종 6)에 동지부사로 다시 청에 다녀온 뒤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성천부
사를 역임하고 북병사(北兵使)에 임명되었다. 이 때 진상(進上)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
기도 했다. 다시 충청도와 전라도 관찰사에 이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엄정한 언사로 반대 세력의 미
움을 받아 나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숙종이 그를 두둔해서 무마되었지만 이 일로 심신이 상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고 부정에 강직하였으며 청렴결백하여 늘 궁핍한 생활을 했기에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처자가‘얼고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곡식을 지급하라는 명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의병장 심우신(沈友信)을 배향하기 위
해 1713년(숙종39) 전남 영광 유림들이 세운 장천사(長川祠:현재는 장성군 지역)에 1726년(영조2년)에 그
의 아버지 제형(齊衡)과 함께 추배되었다. 장천사는 흥선대원군 때 철폐되었지만 1903년 그의 후손 전라
감사 이근호(李根湖)가 찬해서 흠충경현비(欽忠景賢碑)를 건립하고 제사를 올렸다. 1990년에 장천사를
장천서원으로 복원할 때 그의 후손들이 원하지 않아 배향하지 않았다. 묘는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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