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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5년(세종27)에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후 공조정랑을 거쳐 감찰에 올랐으며 세조 즉위
에 공을 세워서 1455년(세조1)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그의 아버지 박광후의 묘도 인주면에 있어서 아버지가 입향조일 수도 있지만 집안에서 전하는 바와
『신정아주지』
의 기록 등을 근거로 아들 박자오를 입향조로 본다. 그가 언제 어떤 사유로 인하여 아산
으로 들어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말년 정도를 기준으로 하여 대략 550년 전으로 추정한다. 묘는
아버지의 묘와 함께 인주면 상도(上道-은고개 일대) 선종암동(善鍾菴洞-관암리)에 있었으나 실전되
었다.
부인은 경주이씨이며 지평을 지낸 이겸선(李兼善)의 딸이다. 임천군수를 지낸 아들 박효번(朴孝蕃),
포천현감을 지낸 손자 박맹달(朴孟達) 등을 두었고 후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45] 함양박씨 박지계
| 朴知誡
<1573년(선조 6년)~1635년(인조13년)>
조선 중후기의 학자이며 함양박씨(咸陽朴氏) 17세로 밀직부사공파 중 소요당파 아산시 지역 입향조
이다.
중종 때「동몽선습」
을 지은 박세무(朴世茂)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박응립(朴應立)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헌부 감찰 이숙의 딸이다.
부인은 남인 계열인 전주이씨(全州李氏) 동지중추부사 이유간(李惟侃)의 딸이며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李景奭)이 그의 처남이다.
박지계는 6형제 중 막내아들이며 아버지 임지였던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자는 인지(仁之)이고
호는 잠야(潛冶)이며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충북 제천으로 피난하였다가 정유재란 때 충북 괴산에 들어가 우거하면서 어
머니를 극진히 간병하여 효행으로도 이름이 있었다.
왕자사부, 좌세마 겸 서연관 등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조정에서 광해군의 생모에
게 비호(妃號)를 올리자는 논의가 일자 신창(현재 위치 불명확)로 들어와 학문에 전념하며 권흥(權
興)·조익(趙翼) 등과 도학을 강론하였다. 1613년(광해군5)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처형당하자 신창현의 집으로 돌아와 우거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보다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략 400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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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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