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928페이지

425페이지 본문시작

국을 논의하는데, 송길한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으로, 신앙자가 많으면 그것만으로 공산


주의사회의도래가늦어지니동인과함께무지한무산대중에대해반종교적의식을환기



하자.”라고말했다.9월상순경에도허경은다시송길한을만났다.이때에도두사람은조


선의 독립 및 신사회 실현을 위해 함께 제휴하여 활동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독립운동을실천하기위해송길한은국내북부지역과만주를돌며동지를규합하기로약


속하였다.허경은송길한에대응하여서울에서중학교에들어가활동하다가장차홍성으



로돌아와조선독립과사회주의운동실현에매진하겠노라고약속하였다.하지만이들의
약속은일제경찰에곧바로탐지되고말았다.
1938년 7월 1일 허경을 비롯해 송길한과 박영달 등 7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홍성
경찰서에유치되었다.이때허경을비롯한5명은7월16일대전지방법원홍성지청검사국
425
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사건을 주도하였던 송길한과 박영달은 예심에 회부되었고,
1939년9월16일대전지방법원에서소위치안유지법위반으로징역1년6개월에집행유예
3년을선고받고옥고를치렀다.그리고1940년칙령제45호에따라징역11개월7일로감
형되었다. 허경은 당시 주동자에서 벗어나 있던 관계로 송길한이나 박영달보다는 가벼운
처벌을받게된것이다.하지만,허경도16일동안이나홍성경찰서와홍성지청검사국의조
사와고문을받았고악형의굴레에서벗어날수없었다.
석방된 허경은 또 다시 배움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일정한 학력시험을 치르고, 1942년
일본에건너가풍도전문학교경제부에진학하였다.하지만,학업은지속하지않았다.허경
의 독립운동 사실은 끊임없이 그를 감시의 눈과 함께 따라다녔고, 결국 입학한 학교마다
퇴학당하였다.이제허경에게남은것은일제에철저히순응하면서친일의길을걷든지,아
니면독립운동의길을본격적으로걷는것만이남아있었다.허경이선택한것은후자였다.
허경이가산으로내려오던논20마지기를매각한것도바로이때였다.자식을잘이해하고
있던어머니는허경에게어디에쓸거냐고물었다.허경은어머니에게“중국의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제출할것이다.”라고했다.그러면서가족들에게는일본경찰에자신을찾으
면,중국에있는일본인경찰학교에입학하기위해떠났다고말하라고전했다.
1945년8월15일,꿈에그리던광복이찾아왔다.독립운동가허경에게도광복은감격의
순간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허경은 마음껏 해방의 환희에 잠길 수 없었다. 허경은 일제강

42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