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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문하의 중심 인물들인 강문8학사들 간에, 특히 외암과 남당(南塘) 한원진
(韓元震)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이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논변이 지속되었다. 호서, 즉 충청도의
학자들은 대개 남당의 주장에 동조했기 때문에 그들을 호론(湖論)이라 했고, 외암의 주장은 주로 낙하(洛
下) 즉 서울·경기 지역의 학자들이 많이 동의해서 낙론(洛論)이라 했다.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즉 금수(禽獸)도 사람처럼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을 가지고 있나
없나 하는 문제이다. 또 하나는 사람이 정(情-희노애락)이 발동하지 않은 미발(未發)의 상태일 때 선악이
나타날 수 있는 기질(氣質)이 있나 없나 하는 문제였다. 외암은 금수도 오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물성
동론(人物性同論)과 미발일 때는 심체(心體)가 순선(純善)하기 때문에 굳이 작동하지 않는 기질을 겸하여
말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남당의 주장은 오상은 금수에게는 없고 미발일 때에도 기질지성이 있고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그 내용이 점차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철학
논쟁이 되었다. 외암의 학설을 지지·계승한 학자들은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김
창흡(金昌翕) 등이었고 남당 쪽은 윤봉구(尹鳳九)·최징후(崔徵厚)·채지홍(蔡之洪) 등이었다.
한편, 그는 일찍이 광덕산 골짜기(강당골)에 관선재(觀善齋)를 짓고 사돈이자 벗인 윤혼(尹 )과 함께 학
문 연마와 강론에 전념하였다. 이곳은 후에 외암서사(巍巖書社)로 불리다가 외암서원(巍巖書院)이라고도
했는데 외암이 시호를 받았을 때의 일로 추정되며 이때 부조묘(不
廟-불천지위)를 명받았다. 흥선대원
군의 서원 철폐를 피해 승려들을 두고 강당사(講堂寺)로 개칭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묘는 송악면 유곡리에 모셨다가 옮겨서 현재는 송악면 외암리 서북쪽 삼상당에 있다. 외암 마을 입구에
후학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짓고 판서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가 쓴 신도비가 있다. 《외암유고
(巍巖遺稿)》
를 남겼으며 외암사상연구소(소장 이원직)에서 이를 근간으로 2008년에 각주를 달고 국역한
《역주 외암 이간의 철학과 삶》
을 출간하였다.
<이간의 묘>
<이간 사당>
[62] 이난손
李蘭孫
< ? ~ ? >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우봉 이씨 12세로 온양(탕정 매곡리)지역 입향조다.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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