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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갔다 한다
유구국 사람들이 이상한 서기를 바라보며 찾아와 재배하며 하는 말이 내가 과거에 점치매
모년 모월 모일에 중국에 가면 당연히 진인을 만날 것이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금일은
즉 그 날이라 그대가 참 그 사람이로다 하며 기뻐 학설을 강론하였다 북창의 섬부란 학식
은 천문 지리 의학 복서에 대하여 배우지 않아도 통달하리만큼 뛰어난 것이었으며 현상은
표일하여 구름에 뜬 학과 바람에 나르는 매와도 같았다
각국의 내빈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나아가 환영을 베푸니 묵창은 그들과 더물어 교제할
때에 보기드문 천인이라 칭찬 받았다
그는
세 때에 진사벼슬에 올랐으나 다시 과거에 뜻이 없어 양구 괘라리에 거처하였다
19
중종조 때에 포천현감에 부임하였다가 즉시 치사함 후에 세로에 뜻이 없어 은둔생활로 묵
년만에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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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이 글을 쓰고 나서 정북창 선생의 슬기와 그 지혜로운 말솜씨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으며 앞으로는 더욱더 모든일에 앞장서서 노력하며 이 나라의 곧고 바른 뿌리가 설
수 있도록 언제나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몇번을 거듭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다짐해
본다
한국의 뿌리가 되겠노라고
……
정 만 석
[ 15]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이 분은 임금의 잘못을 감하는 사간원으로 계시면서 임금께서 잘못하
는 일이 있으며 책임감을 갖고 모든 일에 충실하신 분이셨다 그 중에서도 여러 고을을 암
행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파악하고 탐관오리를 물리치셨다
한번은 이 분이 동래부사로 계실 때 정직하지 못한 관리들이 함부로 일본의 뇌물을 받고
통신문서를 거짓으로 꾸몄다는 것을 알고 이 분은 적은 수의 부하를 이끌고 몇날 몇일을 추
격하고 탐색한 끝에 못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여 올바른 마음을 표하셨다 한다
서부지방을 차별한다고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가 난을 일으켜 민심을 어지럽히자 마침 평안
도 외우사 경감 진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어수선한 민심을 잘 수습하는등 마을 백성
들을 언제나 안전하게 지켜주셨다
또 청나라를 다녀오신 뒤 병 공 이형조 판서를 지내셨고 우의정까지 오른분이지만 평범
한 생활로 남의 본보기가 되시고 언제나 백성의 편에 서시어 이조망의 선비로서 대나무의
자화상 같으신 성품으로 지금까지도 기링 마음속에 남겨져야 할 분이다 이 분의 호는 과재
본관 온양 시호는 숙헌이며
년 영조
년 에 태어나
년에 순조
년 많은 공을
1758
34
1834
34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조 이 숙
[ 16]
선생은 조선 중엽 서기
년 인조때에 출생하셨다
1616
본관은 양주요 자는 경휘이며 호는 달봉이다 부친은 종가선 대부 조상우 선생이시고 출산
은 아산이시다 어려서부터 효자이신 아버지 시암 선생을 본받아 충성심이 강하고 또한 효
성도 지극하셨다
선생의 충성심의 한예로
년 인조
년 인조대왕께서 승하하시자 국상기간동안 채식
1649
27
만 하셨다 이로 인하여 이듬해 병을 앓아 세상을 떠나셨다
세상을 떠나신 후 대덕군 회덕면 사무소 앞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찬하시고 동준 송준열
선생이 쓴 몰세 불망비 가 세워졌다
그 후
년 후에 충청도 유림대표 김석대등의 상소로 철비도 세워졌으나 애석하게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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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현종때는 선생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고 또 정려를 내려 선생의 부
친이신 시암 조상우 선생과 함께 온양읍 온천리 산
번지에 잇달아 정문이 세워졌다 묘소
18
는 송악면 수곡리 산
에 있다
12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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