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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 제창
청년행동대의 총책임자인 송재만
宋在萬
씨의 선창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제창되었다
선서문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각까지 몸바쳐 싸우자
우리는 끝까지 행동을 통일하고 생사를 같이한다
우리는 우리 독립운동을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그 당시 제창하였던 선서문 본문은 유감스럽게도 현재 찾아볼 수 없으니
1972
년 현재 생존한 분들의
기억담을 간추려 기록하였다.
시위 행진
선서문 제창이 끝나고 이어서 행동대원은 전날밤에 등사한 애국가를 나눠주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앞
세우고 선두에는 원로지휘 이인정
李寅正
과 행동총책 송재만
宋在萬
이 앞장섰다 행동대원과 독립추진
위원은 요소 요소에 끼어 대오를 정비하며 비폭력 평화적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대한독립만세와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장정리를 거쳐 천의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미리 연락된 대로 도로 연변에는 면내의 군중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군중들은 도로공사에 쓸 연모를
다 버리고 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며 시위대열에 합세하여 그 의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이 시위 대
열에 참가한 인원은 어느새
800
여명이 넘었다
이 행렬이 천의시장에 이르러 광장에 태극기를 세우자 시장에 모여있던 장꾼 인근면
군중들이 합
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모여들었다.
천의시장
天宜市場
의 시위행진
천의 진입
1919
년 월 일 음 월 일
4
4 (
3
4 ) 11
시경 대호지면민
800
여명이 장정리 쪽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면장 이
인정
李寅正
과 행동총책 송재만
宋在萬
이 지휘한 가운데 만세를 연거푸 부르며 정미면에 이르러 천의
시장 광장에 대형 태극기를 세우고 질서정연하게 모여섰다 여기 마침 천의장날이기에 남녀노소 장꾼까
지 모여 시위 군중 총 인원수는 약
1,000
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시가행진
독립의 열기에 올라 만세를 연거푸 부르는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앉힌 후 남주원
南柱元
이대하
李大
한운석
韓雲錫
들의 연설
演說
이 차분하면서도 성난 사자와 같이 외쳤다 군중들은 다시 흥분을
이기지 못하여 절규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때 천의 왜경이 명 나타나 연설을
3
제지시키고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중과부적임을 아는 왜경들은 심하게 억제하지는 못하였다 군
중들은 우에하라 상원
上原
등 왜경을 붙잡아서 우리 대열에 참가시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종용
하여 할 수 없이 몇번이고 부르다가 틈을 타서 생쥐같이 도망하였다 도망친 왜경은 즉시 인접군이었던
당진경찰서에 사건보고를 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본래의 시위방침에 의하여 비폭력
평화적 시위운동이므로 왜경에 대하여 그 이상 신경을 써서 붙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군중은 다시 태
극기를 앞세우고 먼저와 같이 이인정 송재만이 앞장서서 정미면사무소 앞 광장과 천의 주재소 앞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대한독립만세를 천지가 진동하리만큼 우렁차게 불러댔다 이렇게 만세운동은 오후 시
4
까지 진행되었다.
원로지휘 이인정과 행동총책
行動總責
송재만
宋在萬
은 군중에게 비폭력 평화적 시위에 감사드리고
일단 헤어졌다.
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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