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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기를 한다. 그리고 염색을 하면 매듭이 져 있는 부분은 물이 들지 않아 꽃무늬가 나타
난다.그러니까우리나라전통수와는전혀다른것이다.
홀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옷으로 만들지 않아서 일본에서 전량 수입, 전량 수출을
하였다. 원단도 일본에서 보내주고 모양도 보내주었다. 홀치기는 공장에서 하는 것이 아
니라 집에서 하는 가내수공업 형태였다. 그래서 강경에는 홀치기를 하지 않는 집이 없었
다. 홀치기는 1985년까지 성했는데 1990년도부터는 줄어들다가 지금은 홀치기 하는 집
이없어져버렸다.
홀치기 재료는 비단 원단과 실이었다. 실은 당시 강경에서도 만들었다. 가늘면 60수
굵으면 40수라고 하였다. 무늬는 일본에서 보내왔다. 사업설명서에 보면 나와 있고 샘플
도보내온다.원단이오면강경,논산,부여,전주,안양,서울까지여러집에다맡겼다.정
확히는 몰라도 대략 몇만 가구에다가 분배하였다. 홀치기 하는 공장 수가 15개로 남선,
한광, 이성, 삼미, 큰 공장은 미왕 등이 있었다. 본사는 서울에 있고 강경에는 모든 회사
의 출장소가 다 있었다. 이렇게 많으니까 서로 경쟁이 되어서 아래로는 전주 임실까지,
위로는 안양 서울까지 보냈다. 임실은 직접 가서 가르쳐서 홀치기할 수 있는 지역으로
개발하였다.
가장 어려운 것은 농번기였다. 모심을 때나 가을에 추수할 때는 물량 맞추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농한기가 되면 생산량이 많이 나왔다. 홀치기를 하면 장당 200-300
원정도를주었다.비싼것은한필짜는데2만원정도주었는데원단도크고무늬도어
렵고 짜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돈을 많이 주었다. 기술이 좋은 사람들은 서로 경쟁
이되니까2만원짜리면2천원정도웃돈을주기도하였다.
그의 집은 직원이 4명 정도 있었다. 홀치기를 나누어 주고 걷어 오려면 오토바이가 가
장 좋았다. 좁은 길도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타고 안양까지 간
적도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토바이를 타고 골목골목 다니면서 원단 나누어 주
고 완성품 수거하고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납품할 때는 지금처럼 자동차 운송이 없어
서 주로 대한통운을 이용했고, 서울 본사에서는 그것을 받아 포장을 해서는 부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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