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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재(朴慣在, 77세)씨의 10대조이다.
그는 문과 급제 후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길성(吉城) 정배, 1504년
갑자사화 때 해남 유배로 세상을 뜬 절의 박권(朴權)의 5세손이며 장사랑 박두정(朴斗精)의 현손이
다. 옥천현감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김천일을 도와 고경명 등과 의병 활동을 전개한 증참의 박대기
(朴大器, 1537~1601)의 증손이며 역시 아버지와 형의 뜻을 받들어 의병 활동에 참여했던 선교랑 증
호조참판 박승원(朴承源, 1562~1640)이 조부이다.
무과를 거쳐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낸 증병조판서 박성오(朴省吾 : 1589~1651)가 그의 아버지
이다. 박성오는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과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되
고 병자호란 때도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가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종기를 앓자 한겨울에 두꺼비를 구
해 고쳐드린 효자로도 유명하다. 어머니는 여흥민씨와 완산이씨 중 누가 생모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박수현은 수성(壽聖), 수현(壽賢), 수표(壽彪) 3남 중 둘째아들이다. 형 박수성은 의금부도사, 동생
박수표는 무과 급제 후 봉산군수를 지내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박수현의 자는 인중(仁
仲)이고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용양위 부호군을 지냈다. 부인은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선전관 신철
준(申哲濬)의 딸(1614~1696)이다. 신철준은 고령신씨 아산 송악 종곡리 입향조 신응사의 손자이다.
박수현이 아산에 들어온 것은 혼인에 의한 것이다. 집안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박수현의 5
대조 박권이 화를 입은 이후 후손들은 문과 급제가 어려워지자 무과로 방향을 바꾸었고 전남 영암에
서 서울로 과거 보러 다니는 중간에 박수현을‘심어 놓았다’
고 전한다. 대략 370여 년 전의 일이다.
-박수현의 묘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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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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