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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대학자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 되
어《대학》
의 의의(疑義)를 논함으로써 수암으로부터 학
문을 인정받았다. 신경(申敬)·한원진(韓元震)·현상벽
(玄尙璧)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다가 1709
년에 이들과 함께 수암을 따라 화양동에 들어가 만동묘
(萬東廟) 건립에 참여하였다. 1714년(숙종 40)에 증광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하였고 1719년(숙종 45)에 학행
(學行)으로 천거되어 명릉(明陵) 참봉(參奉)으로 나아갔
다. 그 해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乙科) 2위로 급제하였
고 정언·지평 등 언관직을 역임하였다.
학문이 크고 깊으며 낙론(洛論)을 주장했고 강문 팔학
<강당사 안에 있는 문천사>
사 가운데에 한 사람이다. 수암 문하의 동문인 외암 이
간(李柬)과는 사돈 집안이자 한 고을의 벗이기도 하여 평생을 함께 하였다. 일찍이 외암과 함께 송악면 강
당골에 관선재(觀善齋)를 지어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길렀다. 송악면 강당리에 있는 현재 강당사(講堂寺)
에 관선재와 함께 문천사(文泉祠)가 있어서 이곳에서 지금까지 외암과 함께 봉사(奉祀)되고 있다.
[61] 이간
李柬
<1677(숙종 3) ~ 1727(영조 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서 온양(송악면 외암리) 출신이다. 본관은 예안(禮安)이며 예안이씨 온양 입향
조 사종(嗣宗)의 5세손이다. 친아버지는 군수(郡守) 태정(泰貞)이나 백부 부호군(副護軍) 태형(泰亨)의 계
자(系子)로 들어갔다.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이다. 1708년(숙종 34) 그가 32
세 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를 찾아가 문인이 되고 수암으로부터 추월헌(秋月軒)이라는 호를 받았으
며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깊고 넓어
서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다.
1710년(숙종 36)에 학행으로 장릉(莊陵) 참봉(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15년(숙종 41)
에 다시 세자시강원 자의(諮議)에 천거되자 사양했고 이듬해 다시 천거되었으며 1717년(숙종 43) 종부주
부(宗府主簿)에 임명되었다. 1725년(영조 1)에 회덕현감에 임명되자 부모 봉양을 위해 출사했으나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몇 달 만에 사직했으며 그해 12월에 경연관(經筵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에 충청도도사(都事) 겸 해운판관, 익위사익위로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했으며 그 다음 해인 1727
년(영조 3) 윤3월 14일 51세로 세상을 떴다. 영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초상과 장례 물품을 보내도록
하였으며 1777년(정조 1)에 이조참판과 성균관좨주를 추증하였다. 1810년(순조 10)에 이조판서를 증직하
고 문정(文正)이라 시호하였다.
그는 관직보다는 학문에 중심을 두었고 조선 중기의 사단칠정 논쟁에 이어 전개된 조선 후기 최대의 학
문적 논쟁, 이른바‘호락논쟁(湖洛論爭)’
을 주도하였다. 이 논쟁은 주기론자인 율곡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한 기호학파 내에서 일어났다. 율곡에서 김장생을 거쳐 송시열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정통을 이어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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