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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열여섯 글자를 헌납하였다.
“덕을 닦아 스스로 굳세어지고 마음을 맑게 하여 기운을 기르며, 어진이를 친히 하
고 간사한 자를 멀리 하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보존한다.”
는 것으로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경계의 축원으로 삼
았다.
여름에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여러 신하들이 나이가 차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
던 예를 인용하여 상소를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빌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을에 중풍에 걸리게 되었다. 임금이 특별히 어의를 시켜 궁중에 있는 약재를 써
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선생은 감격하여 울었다. 여러 날이 지나 병이 호전되자 글
을 올려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무신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매우 슬프게 통곡하며 관직에 있을 때와 같이 예를 다
하였다. 병든 몸으로 대궐에 들어가 조문을 마치고 돌아 왔다.
광해군 초에 정우복 경세공(鄭愚伏 經世公)이 임금께 진언하는 말을 올려 줄 것을
기원했다. 외척들이 좋은 벼슬을 맡아 놓고 한다는 글을 올렸다. 광해군이 크게 노
하여 장차 멀리 귀양 보내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공정
해야 하며 바른 말은 듣기 싫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구하여
풀어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언짢게 생각하며 무리를 지어 정우복을 비호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선생은 우복과는 일찍이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었다. 오
리 상공(梧里 相公)이 임금께 글을 올려,
“홍가신의 말은 참으로 사군자의 풍모를 닮았습니다.”
고 하였다.
경술년에 비로소 70세가 되니, 예법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일송 심 정승이 편지를 보내어 치하하기를,
“이 세상의 사대부들 중에서 명예와 절개를 보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허물이 전
혀 없는 사람은 노선생이 첫 번째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을묘년(광해군 7년, 1615년) 봄에는 병환이 있는데다가 부인의 상까지 당했다. 선
생은 주상으로서 상례를 주관함과 아울러 장례를 치름에 병을 핑계 삼아 조금도 게을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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