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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것이지만,이머슴이김정규지사의움직임을감시하던밀정이었다.





김정규지사는독립자금모금의서산군대산면면책으로활동하였다.따라서그는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심을 거듭하였다. 이때 기묘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냈다. 부모


님 묘소의 상석과 비석을 세우는 것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묘비의 제


작비용이벼2석이었다.1933년~1939년머슴의1년고용비용이벼1석반임을참작하면



매우비싼가격이었다.그는서산금융조합에상석의제작비용이라며자금을융자받았다.
그리고추적을피한자금을비밀리에광복군에게전달하였다.이때광복군측에서는김정
규지사에게자금수령의증표로김구주석의친필서명과인장이찍힌증명서를내주었다.
증명서는김구,이시영,이승만등이발급한것으로각1장씩3장이었다.한편,묘비는보령
의오석대신콘크리트로제작하였다.비석전면에는‘孺人慶州金氏(유인경주김씨)學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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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公(학생김해김공)之墓(지묘)嗣子廷圭(사자정규)’라고새겼다.
4)
독립자금을보낸결과는참혹했다.김정규지사는곧바
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서산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리
고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치르게 되었다. 마침 고문을
담당한 경찰이 지곡면에 살던 지인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너는 지곡면에 사는 누구의 아들이 아니냐, 조선 사람이
이러면 되느냐’라고 훈계했더니 사라졌다고 한다. 김정규
지사는 거의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다. 그리고 여생을
고문의여독으로한쪽다리를절뚝거리는장애를갖게되
었다.그렇게일제강점의식민지도막바지로치달았다.그
그림9 김구주석의서명과인장이
찍힌증명서
리고1945년8월15일,꿈에그리던해방이다가왔다.
4)비석의무게는18킬로밖에안될정도로가볍다고한다.그래서인지비석은후일도난당하는수모를겪었다.비
석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라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누군가 이 비석을 절도한 것이다. 그
후유족이현수막을내걸고협조를구한결과,원래자리에갖다놓았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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