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928페이지

404페이지 본문시작

이있다.누군가여기에연필로밑줄을긋고『一九一九,參,一九,獨立만세부름,참석,伐

남,
받았음.』
3)
이라고썼다.이곳에참석할분은당연히김정규지사일수밖에없다.




대산면대산리에보통학교가세워진것은1922년3월이었다.일제가서산공립보통학교


(현서산초등학교)를1911년서산면읍내리(현서산시중앙로38-1)에세운이래로각면


에공립보통학교를세워가던시기였다.이에따라대산면의어린이들도보통학교취학여

5
부로갈등을겪게되었다.학생이부담할비용도많이들었지만,일본인에의한교육에불
신감이컸기때문이다.김정규지사에게도학령아동이셋이나되었다.당시차남김종린이
14살,장녀김종의가11살,삼남김종호가9살이었다.그러나김정규지사는단호히취학을
거부하였다. 나아가 1933년생인 손자와 1938년생인 손자의 취학도 허용치 않았다. 이때
404
김정규지사는 ‘삼세지습(三歲之習) 지우팔십(至于八十)이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지금 일본 식민 지배에 젖어놓으면 나중에 일본말하고 일본에서 살지 모른다.’ 라고 하면
서일본교육을거부한것이다.
일제강점말기인1940년대에이르면서일제의한국민에대한착취는더욱가혹해졌다.
일본의 전쟁은 확대되었고, 부족해진 전쟁물자를 한반도에서 충당하였기 때문이다. 일제
는공출제라하여농민이생산한‘쌀’을수탈하였고,각종쇠붙이와아울러송진기름까지
할당제로 빼앗아 갔다. 김정규지사는 이에 결사적으로 항쟁하였다. 그는 일제가 무기 제
작을 위해 징발하는 숟가락, 밥그릇, 놋그릇 강제공출에 반대운동 추진위원회 대표로 활
동하였고, 송진 채취에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서산경찰서에서 유치되
기도하였다.이때중경에있는임시정부에서광복군을창설하였다.1940년이었다.김정규
지사에게광복군운영경비를모금할지령이내려왔다.순간서산경찰서를중심으로일본
경찰의 감시망도 강화되었다. 당시 김정규 지사의 가산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런 와
중에도송씨라는머슴을한명고용했는데,머슴의시선이매우날카로웠다.나중에드러
3)‘伐’은‘罰’의오기로생각됨.

404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