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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중국인이2명,중국인과한국인사이에서출생한자녀가7명이살고있다.
강경장날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강경이 가장 번창하였을 때 인구가 3만인데, 장날은
5만이라는 말도 있었다. 강경의 상권은 부여군에서는 석성, 세도, 입포, 양화에서 배를
타고 오고, 육로로는 전라북도 익산시의 망성, 용안, 여산까지, 심지어 부여의 홍산면,
서천군 한산면에서까지 강경장에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장날에는 서
있을래야 서 있을 수가 없이 사람에게 떠밀려 다녔다거나, 서로 어깨가 부딪혀서 통행하
기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강경장의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오랜 가뭄이 들면 장
터를바깥쪽으로이동하여장이섰다.일종의기우제라고할만하다.
옥녀봉 서쪽을 세편(서편)이라고 불렀다. 옥녀봉 산비탈에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
데 일반 주택도 있었지만 대개가 술집이었다. 배가 들어오면 배에 널빤지를 걸치고 노동
자들이 목도하여 생선을 하역하였다. 조기는 당시에도 비싼 생선이었고 홍어나 상어의
가격이 저렴했다. 그래서 장꾼들이 홍어나 상어를 사서 지게에 매달고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을쉽게볼수있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마차조합에는 마차를 끄는 말이 30여 필 있었다. 이때까지도 운
반 수단은 주로 말이었는데 점차 소로 교체되었다. 물동량이 많아서 짐을 옮겨 주고 삯
을 받는 리어카꾼이 시장 가까이 중앙장로교회 옆에서 늘 대기하고 있었다. 그 인원도
30여 명이나 되었다니 강경장의 물동량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 수 있다. 또 인력시장
이 형성되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서 모내기 등에 필요한 일꾼들을 구할 수 있었다. 중
앙양조장 옆에 지점집이라고 불리는 막걸리 판매점이 있었는데, 이 집에서는 외처에서
온노동자들에게숙식을제공하였다.
스승의 날 발원에 대해서는, 김무길이 초등학교 근무시에 동료였던 남우직(후에 충청
남도교육위원회 의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스승의 날 제정의 단초
가 된 교사 윤야중을 병문한 학생이 윤석란이라는 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윤야중
이 한 1개월 정도 병석에 있었는데 학생들이 문병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윤
석란이스승의날제정을발원했다고한다.
논산시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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