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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가1896년6월조직되었다.독립협회는독립문을세워중국으로부터완전한독


립을선언하였고,자주국의기틀을잡고자만민공동회를개최하였다.수만명이종로광장



에모여자주독립의길을모색하는토론회와강연회를개최하였다.김정규지사는이곳에


도 참여하였다. 당시는 1898년으로, 김정규 지사가 첫아들인 종우를 낳기 1년 전이었다.


만민공동회에참여한김정규지사는공동회를억압하는보수세력에맞서시위를전개하


였고, 친일 정권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였다. 아울러 을사늑약이 강제적으로 공포된 1905



년 이후에는 오산학교에 가서 민족교육을 받기도 하였다. 오산학교는 이승훈(李承薰)이
1907년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설립한 민족학교
였다.그는이곳에서숙식을제공받으며일정기간민족교육을받을수있었다.그의나이
35세의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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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8월29일은국치일이다.세상에없었던일이벌건대낮에일어났다.김정규지사
는경술국치반대운동을비밀리에전개하였다.나중에안일이지만,경성관훈동(현,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엿도가’라는 비밀 은신처가 있었다. 이곳을 통해 독립운동가들과 접촉
하였고,독립운동자금을전달하였다.‘엿도가’는엿을고아서팔던집으로,일본인들이설
탕을 이용한 사탕을 판매하면서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김정규 지사는 경술국치를 전후
로,이승훈(李承薰,1864~1930),안태국(安泰國,?~1920),양기탁(梁起鐸,1871~1938)
등과의관계를넓혀갔다.김정규지사는10살이넘어가는아들종우에게강조했다.“나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 누구냐. 이완용이, 이지용이, 이근택이, 권중현이, 박제순이 아니냐.
반드시기억해서후손에게알려야한다.”라고.
1919년봄이왔다.아직추위가가시지않은3월19일,김정규지사는해미읍내에서일을
보고있었다.이때남상철(南相喆)이주도하는독립만세운동이일어나고있었다.이를지
켜본지사는힘껏“독립만세”를외치며시위대에참여하였다.그는수많은군중의선두에
서시위대를이끌었고,그결과일본경찰에체포되고말았다.그리고서산경찰서에넘겨져
고문당하게 되었고, 단순 가담자로 인정되어 석방되고 말았다. 이 사실이 확인된 것은 특
이하다.일제강점기출간된것으로추정되는다해진책자중간에‘해미군’이라고쓴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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