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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려노력하였으며‘우리는탁영(濯纓)선생의후손임을잊지않겠다.’라는굳은의지를갖

남,
추고 있었다.
2)
한학을 수학한 그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남달랐고, 일제를 비롯한


외세의침투에항쟁하는유학자로성장하였다.




김정규 지사는 1893년 11월 30일 서산군 대산면 대죽리에 거주하던 전주 이씨 이상헌


(李相憲)의 장녀와 혼인하였다. 1877년생인 이분은 17세의 나이로 21세의 신랑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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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것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김종우(金鍾宇)로 1899년생이고, 차남은
김종린(金鍾隣)으로 1909년생, 장녀는 김종의(金鍾義)로 1912년생, 삼남은 김종호(金鍾
顥)인데1914년생이다.특이한점은이부부가혼인한지6년만에첫아들을보았고,둘째
아들은 그로부터 10년에 낳았으며, 그 이후 약 3년 정도 터울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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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김정규 지사가 가사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치중한
탓이다. 김 지사는 한번 출가하면 2년, 3년을 보낸 뒤에 돌아왔다. 이 때문에 부부 금실은
좋은편이아니었다.후일부인은유언으로남편과합장하지말아달라고했다.
나라가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에 처했던 구한말, 20대 김정규 지사는 서울로 향했
다. 일제는 1895년 음력으로 8월 스무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일제는 뒤이어 단발령을 공포함으로써 서양식 근대화라는 핑
계로한국인의전통인효(孝)정신을말살시키고자하였다.이에격분한유생들은전국적
으로항일의병을일으켜일제의만행을저지하고자하였다.김정규지사도이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나중에서울의어느여관방,몇명의갓쓴유생들이앉아있는데누군가가서
양식으로 머리를 깎은 고종의 사진을 들고 왔다. 이를 본 김정규 지사와 유생들은 한편으
로 기가 막혀서 하면서도 박장대소하였다. 어떤 유생은 너무 웃은 나머지 의원이 와서 침
을놓은다음에야일어났다.
1)『김해김씨삼현파대동보』권13,참판공하편,797쪽.
2)서산시대산읍화곡리는김해김씨집성촌이기도하다.이들은조상대대로무오사화(戊午士禍)와관련된김일
손의기개와절의를숭상하면서내려왔다.지금도화곡리에는김해김씨10여호가거주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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