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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한약방앞길이가장넓었다.
해방 후에 북한은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모아서 6사단을 창설했다. 한국전쟁 당
시에 북한군 최강 부대이던 6사단이 공주-논산-강경-전주-진주로 진격하였다. 그래서
미군이 강경에 심하게 폭격을 해서 강경 시가지의 많은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때에 강경중앙초등학교 강당, 옛 한일은행 등이 불탔다. 그리고 수복 후에 강경의 상권
이크게형성되어있으므로대동전기상회,화신상회등의시가지가재건축되었다.
한국전쟁 중에 강경에서는 전투가 치열하여 많은 건물이 불탔다. 강경중앙초등학교도
전소되었다. 한일은행과 학교 강당은 벽돌로 된 외벽만 남았다. 그래서 학생들은 경찰서
옆의 미곡창고와 강경상고, 강경중학교에서 수업을 했다. 강당을 재건할 때에는 학생들
이 목재소에서 목재를 나르고, 선생님들이 목수들과 함께 건축을 하다가 어떤 선생님은
떨어져서크게부상을당하기도했다.
일제강점기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홍교리, 남교리, 서창리이고, 강경역 관사,
전매서관사등이남아있어서현재강경에는250여채의일본집이남아있다.
강경은 상권이 크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시장을 상시장과 하시장으로 구분했
다. 상시장은 웃장터라고도 불렀는데, 북옥리·홍교리가 중심이었고, 서창리와 중앙리의
일부 지역에 형성되었다. 상시장에서는 주로 곡물과 가축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하시장
은 아래장터라고도 불렀으며, 연수당한약방을 중심으로 한 중앙리가 대부분이었고, 홍
교리 일부 지역에 형성되었다. 대나무와 소쿠리를 비롯한 죽제품·솥 등의 주물·철물·사
기그릇·비단을 비롯한 옷감 등이 거래되었다. 하시장이 상시장보다 품목도 다양하였으
며,따라서상권도크게형성되어거래량이많았다.
일본인들은 홍교리 하시장 부근에 많이 살았다. 또 중국인들도 강경에 화교학교를 설
립할 정도로 많이 살았는데, 이들의 주거 지역은 주로 중앙리에서 태평리로 가는 지역이
었다.이들은비단가게라든가빵집,음식점을경영했는데,통계에의하면한때는300명
이나 되었고 70년대까지 상당수가 살았다. 1952년에 화교학교를 개축했는데 군산 등지
에서 축하 화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화교학교 학생은 60명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400 논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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