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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몽학정난비(夢鶴靖難碑)
: 몽학정난비는현재홍성읍
서쪽의 백월산 산혜암 입구
에 있는 충청남도 문화재자
료 ‘홍가신청난비 (洪可臣淸
亂碑)’를 일컫는다. 그러나
몽학정난비가 본래 있던 자
리는 [그림 1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동정자와 숲거
[그림 18] 말무덤 기슭에 있었던 이몽학정난비
리를 지나 옛 금마천(현재
삽교천)을 건너기 바로 전 구릉
의 기슭에 있었다. 「홍주지도」에 의하면 몽학정난비는
31)
처음부터그자리에있었던것으로보인다. 몽학정난비는조선선조때1596년(선조29)
임진왜란중에이몽학이주동이되어충청도홍산에서일으킨반란을진압한홍주목사홍
가신(1541∼1615)을 비롯한 청난공신을 기리는 비석이다. 비는 인조 19년(1641)에 세
웠는데,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파손된 것을 1973년 홍성군수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
고있다.
32)
31) 홍성사람들은이곳을최영장군의말을묻혔다고하여‘말무덤’이라불렀다. 고려말최영장군이금
마면죽림리산43에있는철마산에서자신이타고있던말과내기를하였는데,철마산에서은행나무
가있는금마면장성리은행정으로화살을쏘면서말을달려누가빨리목적지까지가는지내기를했
다는것이다. 내기결과말이늦은줄알고말을죽였는데그후화살이당도하자자신의행동을후회
하며말을묻어주었다는전설이전해지는곳이다.
32) 이몽학은본래왕실의서얼출신으로,아버지에게쫓겨나충청도·전라도등지를전전하다가임진왜란
이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휘하에서활동하였다. 그러나계속되는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비참한데,당시조정에서는명(明)·일(日)사이에강화를둘러싸고찬반논쟁이치열하였다.일
본의재침을방비하기위해각처의산성을수축하는등민중의부담이가중되자확대되어가는민중의
원성과고통은현실여건과타협될수없는사회모순을낳게되었다.이러한기회를포착해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을 선동,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홍산(鴻山: 지금의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모의를하고군사를조련하였다. 동갑회(同甲會)
라는비밀결사를조직해친목회를가장한반란군규합에열중했다.난을토평(討平)하는데공을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
행·임득의등이책록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0_역사를 품고 살아 숨 쉬는, 홍성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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