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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감동받아 반드시 흥기된 것이 있는지 또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인정과 풍속
교화에 근본을 펼치고 베푸는 일은 급선무인데 우리 군수의 거사는 그 근본을 세우되
그 끝을 재지 않고 갓옷을 떨치고 앞장 서는 뜻이니 그 공적과 효능이 얼마나 깊게
흐를지는 비록 거구로 헤아려 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아마도 주자 이후 천년 만에
나온 한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거칠고 무딘 나는 비록 우리 군수의 서고의
한 마리 좀벌레가 된다 할지라도 오히려 분수에 넘치지 않을까 두렵다.
하동 정창현 적음
절목
대개 향교는 공자님을 높이어 제사 지내는 곳이며 많은 선비들이 마음에 그리는
곳이다. 인륜이 이곳에서 분명하여지고 아름다운 풍속이 여기에 바르게 되더니 거룩
하게 여겨 받드는 도리와 예를 갖추는 절도를 어떠한가를 돌아본다면 어떠한가.
내가 덕풍현에서 이곳으로 부임하여 전묘(殿廟)를 살펴보고 선비들을 만난 즉 향교의
법도가 흐트러지고 제기가 정리되지 않았으며 창고가 텅 비어 향교의 수요에 대응하
는 대책이 없었다. 강(講)하는 선비들은 항상 굶주린 기색을 떨치지 못했고 재임은
해진 옷이나마 마련할 방도가 전혀 없었다. 더구나 근래 물가가 올라 제사를 지내는
철이 되면 모양을 갖출 방도가 전혀 없었다. 매번 제사를 맞을 때마다 초조하고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몹시 구차하고 군색하고 마음이 편치 않음이 막심하였더라.
이로 인해 선비들이 여러 차례 모여 그 재정을 강구하니 춘포 가운데 집집마다
5푼씩을 걷어 재정으로 삼자는 뜻이 유장에 나타났다. 향교의 일로 말하면 향교
일이 막중하나 백성의 형편으로 말하면 백성의 형편 또한 어려우므로 집집마다
다만 2푼씩만 허락하고 관아에서 특별히 250량을 내어주어 절목을 아래와 같이
만들었다. 이로써 만의 하나를 도우니 향교의 여러 곳에 비가 새고 기울어져 고치고
이어야 할 곳이 또한 잠시도 늦추기가 어려웠다. 이는 내가 스스로 중용에 힘쓰는
사람으로서 그 결과가 뜻대로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오호라 이 고을은 우리 도애선생
이 임진왜란 때에 절개를 다 한 곳이니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과 불효를 안타까이
여김이 더욱 절실해지며 두려워 떨게 된다. 재주는 부족하고 폐단이 극에 달하니
일을 잘못하여 그르칠까 두렵다. 우왕이 일컬은 해가 명년인지는 알 수 없으며 뽕나무
울타리에 깃든 새도 해가 지면 돌아 갈 줄을 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두려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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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지역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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