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80페이지

41페이지 본문시작

[58] 윤정식
尹鼎植
< ? ~ ?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1819년(순조 19)에 아산현감으로 부임하자 곧 홍이도(洪
履度), 이호빈(李浩彬) 등 지역 유림 등을 모아 그 해 말에《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
를 편찬하였다. 이 책
은 지금까지 전해져서 아산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향교를 보
수하고 주변을 정리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펼쳤다. 지역 사람들이 선정비를 세
워서 영인면 아산리 면사무소 경내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59] 윤지복
尹之復
<1569(선조 2년) ~ 1638(인조 1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녕(新寧)으로 사헌집의
자임(自任)의 현손이다. 증조부는 충무위부사직 침( )이
고 조부는 내금위부사직을 지낸 세균(世鈞)이다. 부친은
삼척부사를 지내고 병조참의에 추증된 죽촌(竹村) 필은
(弼殷)이다. 자는 득초(得初), 호는 용암(勇
혹은 勇庵)
이다. 그가 24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00여
명의 의병을 데리고 충청도 병사(兵使)에게 달려가 합세
해서 충의를 다했다. 37세 되던 1605년(선조 38)에 진사
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606년(선조 39) 다시 식년 문과
에 을과(乙科) 3위로 합격하였다. 승정원주서·성균관전
<윤지복의 묘표>
적·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광해군 즉위(1608년) 후 성환
찰방(成歡察訪) 직에서 파직 당하였으나 1614년(광해군
6) 영산현감으로 제수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의령현감 재임 중에 술을 너무 좋아하여 파직되기도 했
지만 뒤에 강원부사(江原副使)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정두경(鄭斗卿)·차천로(車天輅)·민사성
(閔師聖)·공희성(孔希聖)·이진행(李震行)·정운붕(鄭雲鵬)·강취무(姜就武) 등과 더불어 아산 지역의
‘팔문장(八文章)’
이라 일컬어졌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묘는 아산 여사동(如思洞- 현재 영인면 신
화3리 여술) 아버지의 묘 아래에 있다.
[60] 윤혼
<1676(숙종 2년) ~ 1725(영조 1년)>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다.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관찰사 희길(希吉)의 5세손이며 참판(參判) 매음(梅
陰) 근(根)의 현손이다. 동명(東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韓)씨 성(宬)의 딸이다. 자는 회이(晦爾)
고 호는 천서(泉西)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미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1707년(숙종 33)에
40

41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