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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선생의 진언은 곡진하고 맛이 있으니, 가히 문장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을 알겠
도다.”
하였다.
당시 국가의 권력을 잡은 재상들은 백성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선비
들은 정사에 참여하기를 꺼려해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면서도 항상,
“우리나라 신하들의 벼슬 이름과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명 등을 기록한 명정
에는 늙어 벼슬에서 물러났다는 치사란 두 글자를 쓴 사람을 볼 수 없으니, 가히 부
끄러운 일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개성유수로 부임해서의 일이다. 그곳의 풍속은 장사를 숭상하여 먼 곳의 물건을 많
이 들여와 사고팔고 하였다. 그러므로 관리로 있는 자들은 중국 사신이 올 때를 대
비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은자와 인삼을 시장에서 사다가 관청의 창고에 저축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쓰는 것이, 전예가 되어 온 지 오래였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재
물이란 기름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사람을 더럽힌다고 생각 하였다. 시장의 상인들
에게 행사의 순서와 물건의 늘어나고 줄어듦을 헤아려 준비하게 하였다. 사용할 필
요가 있을 때 바로 시장에서 가져다 쓰도록 조치했다. 아전들은 여기에 간여하지 못
하게 했다. 이를 백성들은 매우 편하게 생각하였다.
왕족이 살던 여러 궁가의 노비들이 왕족의 세력을 믿고 개성부의 백성들에게 제멋
대로 행패를 부리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아전궁에서 건장한 자를 뽑아
행패가 심한 궁노들을 모두 잡아들여 일일이 법에 따라 처리하니 감히 개성에는 들
어오지 못했다.
또한 일찍이 화공에게 도연명의‘귀거래도’를 그리게 하여 벽에 걸어 놓고 항상 바
라보았다. 가을바람이 쓸쓸하게 불어오자 상소를 올려 사직을 했다. 그날로 예성강
에서 배를 타고 이틀 만에 아산의 공세리 포구에 닿았다. 선생의 옛 집이 있는 염치
읍 대동리로 귀향하기 위해서였다.
정미년(선조40년, 1607년) 봄의 일이다. 공신들에게 계절의 가운데 달인 음력 2
월, 5월, 8월, 11월에 베푸는 연회와, 나이가 아주 많은 신하들에게 베푸는 상수연
의 날짜를 가려 선생을 초청하였다. 몸이 아파 참석하지 못하고 간단한 서식으로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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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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