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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요락이 있다. 주민들은 농업을 주로 하면서도 어업에 종사하는 경우도 역시 많아서 어살
[漁箭]어장 7개소가 있다. 예로부터 그 소유자는 일정해서 매매·증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살 1개소의 축조비는 20원 내지 30원을 필요로 한다. 매년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건설하는데,
주민들은 풍어 시에 어획물의 일부를 나누어 받는다.
상대산리·하대산리·석포
상대산리는 인가 5호, 하대산리는 3호, 석포는 37호를 이루고 서로 접하면서 남면에 속해 있다.
뒤로 구릉이 연달아 있고 앞으로는 높은 지대의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서 선박을 정박하기에
적합하다. 상대산리의 전안(前岸)은 깊은 간출만(干出灣)으로서 사기소리에 인접하는데, 대조시
이외에는 양리 사이의 왕래는 개펄위를 통로로 한다. 하대산리는 상대산리의 북쪽에 있다. 석포는
하대산리에 접하고 각 마을 어디에서든 모두 토지가 협소해서 수전(水田)이 없고 겨우 화전 20요락
내외를 보유하고 있다. 주민의 다수는 출가를 않고 여자는 물가에서 패류를 채취한다.
Ⅱ. 서산의 해상교통
1) 운하
조선시대의 해양정책의 기본은 선운(船運)이었다. 조선후기에 생산력이 증대되고, 그 잉여생산물이
처분되면서 자본의 축적이 가능했다고 하면,그것을 매개하는 기본적 역할은 말할 것도 없이 운송
체계였다. 운송체계란 그 의미에서 볼 때,지역 간 이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운송은 생산능력에
서뿐만 아니라 물화의 가치를 증대시켜주었다. 왜냐하면 물화의 가치는 장소적 제약을 받는 탓이다.
실로 자본축적의 전제가 되는 전국적 시장권, 또는 원거리무역을 위해서는 운송체계의 발달이
필수적이었다. 더욱이 조운선의 제도화는 국가재원인 세금징수라는 차원에서 대단히 소중하였다.
67)
조운선이 나다니는 조로가 험난하기로는 안흥과 강화 손돌목을 꼽았으며, 모두 돌뿌리가 준험하
68)
고 물결이 빨라 배가 자주 난파당하였다.
가령 태종 14년 8월의 경우, 대풍으로 전라도의 조선
66척이 침몰하여 200명의 익사자와 미두 5,800석이 패몰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듯 끊이지
않는 해난사고 때문에 굴포(掘浦)는 이미 고려 인종 때 부터 의론된다. 고려 인종 12년, 안흥정 밑
의 해로는 많은 갈래의 흐름이 부딪치고 암석의 험악함이 있으므로 홍주를 통해 수로를 굴착하여
통하게 하면 배를 운행하는데 바르다고 해서 수천의 사졸을 동원하여 10여리를 굴착하게 하였으
나 실패하였다. 려말 공양왕 3년에도 다시금 이미 굴착한 도랑을 파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신숙주가 다시 굴착하였으나 역시 성취하지 못하였다.
「선조실록」18권(선조17년 4월26)에 감목관(監牧官) 신점(申點)이 서계(書啓)하기를, “전라도의
67) 최완기,
『조선후기 선운업사연구』
,일조각,1989.
68) 다산은 배가 난파당하는 원인을 다음 같이 정리하고 있다. ① 배를 만드는 제도가 좋지않고,② 수령들이 가외의 것을 보태어
실은 때문이며,③ 뱃사람들이 일부러 파선시키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經世遺表』1권 지관 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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