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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후는 179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신앙을 고백하였는데 풀려나고, 그 후에도 어쩐 까
닭인지 몇 차례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60이 넘은 고령이어서 였던
가,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지만 얼마 후 풀려났다. 그 후 1805년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
송되었다. 김진후가 신자다운 행동을 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그는 관장 앞에서 당당하게 신
앙을 고백하였다. 그런데도 당신 박해가 공식적인 것이 아니어서 사형 판결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 했다. 김진후는 옥중에서 신앙이 불붙어 드러내 놓고 기도생활에
열중 했다. 그러기를 10년 세월을 옥에서 지내는 동안 노구를 지탱하지 못하고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때 나이 75세였다.
4. 끝나지 않은 순교
앞서 말한 순교자들은 한국천주교가 겪은 초기 박해의 순교자들이었다. 신앙 선조들의 믿
음살이는 후대의 모든 신도들에게 스승이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순교자들은 앞서 가신 선조
들의 표양을 역사 안에 지속시키며 살려냈다. 조상들도 해냈듯이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용
기를 져버리지 않았다. 선조들의 교훈과 표양은 성인이 되기를 바라는 후손들에게 마중물처
럼 희망의 생수를 퍼 올렸다. 어찌 시복시성이 천주교인들만의 잔치겠는가. 성인들의 표양은
현재도 미래에도 모든 사람에게 삶의 자양분이다.
서산문화에서 종교문화를 빼면 허전하다. 서산인은 오랜 역사 동안 미륵신앙을 보며 살과
뼈가 자랐다. 서산인은 꿈을 먹고 살았다. 《내포문화연구》
의 오윤희는 미륵불(
)은 희
망을 꿈꾸는 미래불(
)이라고 한다. 순교자의 믿음살이 역시 희망을 꿈꾸며 살던 신앙
이었다. 서산문화는 종교상생이 가능하다. 한국 천주교가 기다리고 있는 시복시성은 서산인
의 축제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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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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