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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을이끌고만세를불렀다.이어서김관룡은해미면의뒷산에올라봉화를올렸다.아울

남,
러시위군중을이끌고해미경찰관주재소로돌진하였다.그결과총으로무장한일본경찰


에붙잡힌군중은200여명에이르렀고,서산경찰서에송치된인원도수십명에이르렀다.




만세운동이 끝난 뒤에 주동자로 지목된 김관룡 지사는 이계성, 김연택, 유세근과 함께


공주지방법원으로 넘겨졌다. 이곳에서 1919년 4월 21일 김관룡 지사는 이계성과 함께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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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법위반및협박으로징역1년,김연택과유세근은태형90도를선고받았다.하지만김관
룡지사는경성복심법원에항소하였고5월19일열린항소심에서다시징역1년을선고받
았다.그러나김관룡지사는승복하지않았다.또다시‘자신이행위는조선민족으로서정
의 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 제1심과 제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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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하여복종할수없다.’라고자신의정당함을주장하였다.하지만1919년6월19일고
등법원은 상고를 기각하였고,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말았다. 나머지 3분
은 공주지방법원의 선고대로 형량을 치렀다. 당시 조선총독부 법원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국인의형량을감형한사례는극히적었다.그런데도끝까지투쟁한김관룡지사의옥중
항쟁은많은이들의이목을끌기에충분한것이다.여기에는김관룡지사의독립정신과함
께해미지역의상무정신이배합된결과라하겠다.
일본경찰은형기를마치고석방한김관룡지사를감시와억압의대상으로간주하였다.
이때문에김관룡지사는현실적으로아무것도할수없었다.특히해미보통학교수옥교장
의학적부삭제와졸업대장삭제는김관룡지사로하여금상급학교진학의꿈도없애버렸
다. 김관룡 지사는 결국 산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삭발식은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개심사(開心寺)에서 거행하였다. 그후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덕산의 수덕사(修德寺),
보덕사(報德寺)를 거치게 되었다. 김관룡 지사는 이곳을 전전하면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고,불교신자에대한강연과대담을통해은연중독립사상을고취시켰다.
그는해방후잠시환속하였으나,좌우의대립속에혼돈에빠진해미의정국은독립운
동가를온전히받아들이지못하였다.회의를품은김관룡지사는식민지기자신을받아준
산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덕산의 보덕사와 당진의 영랑사(影浪寺) 주지로 활동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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