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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많아서 이런 대장간이 두 군데가 있었다. 한 곳은 마차조합 옆이고, 하나는 강경상업
학교 옆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그 말을 그냥 마부에게 주고 황급히 일본으로
돌아갔다.그래서박노익은자기소유의말을가지게되었다.
스물한 살 되었을 때에 마차 끄는 집에 색시가 있어서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스물세 살이 되었을 때에 영장이 나와서 입대하여 삼년간 강원도 인제에서 복무하였는
데,한국전쟁중이라매우위험한고비를여러번넘겼다.휴전이되고스물여섯살에제
대했다.
제대 후에 쌀장사를 시작했다. 트럭 한 대에 쌀 80가마 정도를 싣고 서울에 가서 판매
를했다.판매는당일에이루어지기도하지만다음날까지이어지는경우도있었다.그러
나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그래서 쌀장사를 그만두고 한국산업사 정미소에 취직을 했다.
이 정미소는 일제강점기에 다카하시정미소라 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생산한 벼를 도정
하여 그 쌀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한국산업사에는 10여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쌀을 차
에 실어주고 푸는 일을 했다. 하루 품삯이 쌀 한 말 정도로 대우가 좋았으나 매우 힘이
들어서아무나할수있는일이아니었다.특별히힘이좋은사람만이가능한일이었다.
그가 정미소에 근무할 때는 도정 기술이 발달하여 쌀에 돌이 섞여 있지 않았으나, 전
에는 쌀에 돌이 섞여 있어서 판매를 하려면 돌을 골라내야 했다. 그래서 정미소에는 쌀
에서돌을고르는여성근로자들이여러명이있었다.
그는 한국산업사에서 십오륙 년가량을 근무하였다. 근무 중에는 대우가 좋아서 자녀
들의 학비를 주었기 때문에 모두 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퇴직할 때는 퇴직금으로 600
만원을받았는데,쌀값으로는80가마정도의금액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강경에 신사를 짓기 위하여 원목을 가져왔던 일에 대해서도 말했
다.선창이있던노동조합옆과바깥의강에이십여개의원목이있었는데,그굵기가두
아름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해방이 되어서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그 원목은 제재소에
서켜서목재로사용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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