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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손으로짜는수직기(手織機)였다가발로짜는족직기(足織機)로발전하였다.
그는 스물한 살 때에 훈련소에 입대하였다. 군대에서는 기계를 다루어 본 경력을 인정
받아 춘천비행장에서 경비행기를 정비하는 일을 했다. 3년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강
경으로 돌아와서 다시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던 개성직물에서 7년간 기술자로 일했다. 직
조기가 발전하여 한 사람이 직조기 2대씩을 담당했다. 당시 개성직물에는 베 짜는 사람
과염색을담당하는사람을합하여30여명의직원이근무하였다.
강경직물(개성직물의 명칭이 바뀜)에서 근무하다가 작은아버지 부부가 사망하자 그
아들과 며느리가 공장을 경영했는데, 경영상태가 점점 어려워졌다. 그래서 최호정은 공
장을나와서두아들의이름자를따서영재직물이라는회사를창업했다.
일본에서 수입한 서상록직기가 있었지만 그의 공장은 수직기와 족직기였다. 하루에
한 사람의 기사가 짜는 베의 길이는 한 필 반인데, 한 필은 서른 마이다. 또 한 마는 석
자(1자는 30.3cm)이니 한 필의 길이는 대략 27미터 정도이다. 베는 실의 굵기에 따라
풀질이 달랐다. 23수, 30수, 40수가 있는데, 23수의 굵은 실로 짜서 거친 느낌을 주는
베를 개성베라고 한다. 개성 사람들이 공장을 많이 운영한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개성
베는 한때 이불 홑청 등으로 서민들이 널리 이용하던 베이다. 원래 대구가 직물이 유명
한데개성베는강경이유명하였다.그래서대구에있던사람들도강경으로이전하였다.
그는 가끔 서울의 백화점에 가서 일본에서 나오는 옷감의 무늬를 보고 와서 제품을
생산했으므로 다른 공장의 제품보다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또 기술이 뛰어나서 40수로
짜서 와이셔츠의 원단이 되는 고급 제품을 생산했다. 다른 공장에서는 생산할 수 없는
제품이었다.따라서가격도높았다.물건이없어서팔지못할정도로인기를끌었다.
현재 그는 아들들을 대학까지 공부시켜 초등학교 교장 등으로 출세시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껏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고 했다. 기술자로 근무하던
중에 공장에 다니던 아가씨와 그냥 함께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연구심도 많다. 재력이 없진 않지만 요즘은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여 하루 삼만 원
을번다고했다.
논산시 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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