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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같이할아버지를존경하였다.김관룡할아버지가독립운동가셨기때문이다.





김관룡 애국지사는 1900년 10월 17일 서산시 해미면 동암리 82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셌다. 이 때문에 동네 아이들과 놀 때, 그는 항상


골목대장의위엄을뽐냈다.이들은항상해미읍성에올라가놀았다.해미는1417년(태종


17년)이래로충청병마절도사가군영을갖추고군사를지휘하던병영도시였다.병마절도



사가청주로이전한1652년(효종3년)이후에도해미현감은겸영장(兼營將)으로서군사
를통솔하였다.해미는조선시대충청도서북지역의군사적요충지로서외적의침입에대
한 방어는 물론, 지방의 원활한 행정과 안정적 통치의 거점 도시였다. 군사적 성격의 지역
적 특성은 ‘애국애족의 상무정신’을 주민들에게 고취했고, 일제를 비롯한 외세 침투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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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력한투쟁정신을함양하였다.어린시절의김관용애국지사도해미읍성에오르면서
일제의식민지로전략하는나라를생각하며울분을머금고있었다.
한말 근대교육 운동은 해미에서도 전개되었다. 1909년 5월, 해명학교(海明學校)가 해
미향교의 전교를 지낸 윤세영(尹世永) 등 민족자본에 의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김관
룡지사가이학교에다녔는지알수없지만,1910년8월대한제국을멸망시킨일제는해명
학교를강제로통합하여해미공립보통학교를출범시켰다.이학교는1912년3월8일조선
총독부로부터설립인가를받아5월10일4년제보통학교로개교하였다.개교한곳은해미
읍성안의객사건물인지성관(枳城館)이었다.현재의해미초등학교가이렇게세워졌다.
김관룡 지사는 1915년 4월 늦깎이 16살의 나이로 해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당
시 입학생 정원은 30명인데 지원한 학생도 같은 30명이었던 것을 보면, 보통학교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이 매우 냉소적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여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실
제로일제강점초기의보통학교에대한한국인학생의지원율은매우낮았다.주민들은일
본인들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헌병경찰통치로 불리는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에 강렬한
저항의식을품고있었기때문이다.주민들은서당이나사학에자제들을입학시켰고한학
을익히며민족적전통을계승하고자노력하였다.하지만,김관룡지사는해미공립보통학
교에의 입학을 결심하였고 소위 근대학문이라고 선전하는 일본식 교육을 정면에서 맞닥
뜨리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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