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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그는 강경의 중앙양조장에서 다시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월급도 그리 많
지 않았고, 아내도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롭기도 하여 강경으로 되돌
아왔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즈음이었다. 그때 그는 이제 양조장의 일류 기술자가 되
어 있었다. 따라서 동해시에서보다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새로 옮겨 온 양조장의
직원은 그를 포함하여 세 명뿐이었다. 이제 시설이 기계화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양조장
에서는생산만하고판매는다른곳에서했다.
당시에 강경에는 네 군데의 양조장이 있었다. 태안양조장, 대흥양조장, 중앙양조장, 채
산양조장이었다. 주조장별로 생산량을 배정받아서 생산하고 판매를 했다. 그러다가 전
국적으로 합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태안양조장과 채산양조장은 제품을 생산하
지 않고 중앙양조장과 대흥양조장 두 군데에서만 제품을 생산했다. 당시에는 막걸리의
수요가 많았던 시절이라 하루에 20리터 800통을 생산하여 판매했다. 강경에서 생산한
막걸리는채운면과부여군세도면까지판매되었다.
그러다가 생산 시설을 채산양조장 한 군데로 옮겼다. 그런데도 생산 시설이 기계화되
어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오 명에 불과했다. 판매하는 배달꾼들이 십여 명이 있었
다. 그들은 자전거를 이용하여 배달하였는데, 힘이 좋은 사람은 한꺼번에 열 말 넘게 싣
기도했다.
한상희는 생산에 관한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보수는 적었다. 한때는 군수보다도 더 많
은보수를받았었는데역전되어서읍장보다도적은월급을받게되었다.
동해시에서 많은 보수를 받아 고향인 광석에 서른 마지기 가까운 논을 샀었다. 그런데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서 고향에 사 두었던 논을 많이 팔았다. 자
녀들이잘성장했고아내도건강하기때문에현재에만족한다고했다.
68세에 퇴직하였는데, 사무 능력이 있어서 경로당 총무 등으로 봉사를 하였다. 돈을
잘 쓰는 편이라 주위에서 여러 단체의 회장을 하라고 하여 여러 직책을 맡기도 했다. 지
금도경제적여유가있어편안한노후를보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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