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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서원 입지환경과 주변의 관련 암각체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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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원구지는유허비설단과함께관련된많은암각체가파괴되었고
수몰되는 과정을 겪는다. 큰 문화재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본고에서는회암서원의 건립입지 조건과배향 인물, 그리고이미
밝혀진내용이있지만건립주도인물과지역의향촌사족들의동향을
개괄적인검토를 하고자 한다. 아울러회암서원의 무이천(武夷川) 주
변의 암각체를 간략하게나마 고찰하여 회암서원과의 관련성을 유추
해보고자 한다.
2. 회암서원의 입지환경과 배향인물 행적
회암서원은죽천김진규(金鎭圭: 1658~1716)
가1706년병조참판
3)
에있을때소론이집권하자2년간덕산에서귀양살이하면서덕산현
감이정진(李廷晉)
의보이지않는도움을받았던것으로보인다. 김진
4)
규가 노론의 학풍을 견지해 오던 봉림골 한산이씨 집성촌을 찾았을
3) 노론의 대표적 정객으로 송시열(宋時烈)의 입장을 고수했다.
본관은광산. 자는달보(達甫), 호는죽천(竹泉). 아버지는광성부원군(光城府院
君) 만기이고,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
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1682년(숙종 8) 진사시에, 1686년에는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694년 갑술
환국으로남인이 제거당하자 지평에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대립이깊어
지면서, 소론 남구만(南九萬)으로부터 척신으로서 월권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동부승지로서 송시열과입장을 달리한 윤증(尹
拯)을 공박하여 소론과 대립했다.
4) 김진규가 덕산에서 귀양 사는 동안 덕산현감은 이정진(李廷晉)이었다. 그는
기사환국(1689)으로 인현왕후 여흥민씨가 폐위될 때 절의를 세운 이조판서
이세화(李世華: 1630~1701)의독자로비록소론이지만 노론에서존중하는 인
물이었다. 최완수, ?고덕면지? 제1편 총사, 29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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