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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윤득실
尹得實
<1768(영조 44년) ~ 1823년(순조 23년)>
해평(海平) 윤(尹)씨 아산 입향조이다. 영의정 두수(斗
壽, 1533~1601)의 6세손이고 지중추부사 흔(昕,
1564~1638)의 5세손이다. 자는 성보(誠甫)이고 부인은
남양 홍(洪)씨 득권(得權)의 딸이다. 집안이 많이 기울어
서 처가가 있는 아산 둔포 신항리로 오게 된 것으로 보인
다. 그러나 손자 웅렬(雄烈)의 출세에 따라 이조참의에
이어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그 후 내부협판(內部
協辦)으로 추증되었다. 셋째 아들 취동(取東)의 후손으로
손자 웅렬(雄烈)·영렬(英烈)과 증손(치호·치왕·치
창·치오·치소·치영)과 현손(영선·일선·보선)의 대
<윤득실의 묘비>
에 집안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묘소는 아산현 일북면
시곡(柴谷), 현재 음봉면 동천리 해평 윤씨 종중 묘역에
있다.
[57] 윤자임
尹自任
<1407(태종 7년) ~ 1478(성종 9년)>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신녕(新寧)이며 아버지는
신비(莘卑)이다. 자는 충부(忠父)이다. 1432년(세종 14)에
박팽년과 함께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하였으며 1450년(문
종 즉위년) 식년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정
언(正言)·사헌부장령(掌令-종4품)을 거쳐 승문원 부교
리 겸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정산현감·영주군수·경기
도사를 역임한 뒤 사헌부 집의(執義-정3품)에 이르렀다.
정산현감 때 선정을 베풀어서 주민들이 동비(銅碑)를 세
웠다. 연로하여 치사(致仕)하고 벼슬을 물러나와 아산현
의 고용산(高湧山) 아래 금점리(金店里-현재 영인면 성내
<윤자임의 묘>
리 쇠재 추정)에 와서 우거(寓居)하다가 72세에 졸했다.
묘는 온양군 남쪽 화산(華山), 현재의 송악면 평촌 2리 홰
쟁이 마을 뒷산에 있다. 묘표가 있으며 그의 현손 지복(之復)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묘표는 글자가 마모
되어 확인이 어렵고 1984년에 후손들이 새로 세운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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