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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궁궐과 통하자는 일이 아닌가. 사대부의 염치를 이런데 쓰지 않고 어디다
쓴단 말인가. 하물며 이 고을은 한 편으로는 제궁을 받들고 한 편으로는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일에 이바지하느라 백성들의 고혈이 이미 다한지라, 내 어찌 차마 일신상
의 안위와 지위를 보존하기 위하여, 가렴주구의 죄 하나를 더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해 겨울에 드디어 벼슬을 내어 놓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임인년 봄에 청난원훈(淸難元勳)으로 책공(策功) 되어, 서울로 들어와 상소를 올렸다.
“미친 역적 이몽학은 오합지졸의 무리로 까마귀 떼처럼 모였으니, 가식(假息)의 혼
이요 솥 속에 든 물고기 같은지라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신이 홍주성
을 지킨 것은 바로 신하된 자의 마땅한 직분이오니 어찌 공신록에 기록될만한 공이
있다 하겠습니까. 황공하여 감히 사양 하겠습니다.”
하였다. 사양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으나, 판결사를 제수하심과 동시에 주역(周易)
교정청 당상(校正廳 堂上)에도 참여하도록 하였다. 얼마 뒤에 형조참판을 제수하였
으며 또 강원감사에 옮겼으나, 도감의 녹훈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장계
를 올려 서울에 머무르게 하매, 한성우윤으로 고치고 금오당상(金吾堂上)을 겸했다.
갑진년(선조 37년, 1604년)에 녹훈이 끝나자 정헌대부(정2품)로 승진 시키매 간절
하게 사양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특별진급으로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입시하게
되었다. 이때 임금께 병환이 있는지 오래 되어, 여러 신하들이 의원과 약의 처방에
대하여 논했는데 선생만이 홀로 나가서,
“옛날 말에 병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올바르게 행동하여야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듯이 마음 역시 오장육부와 백가지 혈
맥이 일금과 같으니 반드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근본 근원을 올바르
게 길러야만, 모든 병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갓 약에만 의존할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니, 듣는 사람들이 참으로 잘 풍자했다고 하였다.
을사년에 홍수가 일어나 백성들이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 선생이 임금께 왕자들의
집이 법도에 지나치고 무장들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하여 아뢰니, 만취
(晩翠) 오억령공(吳億齡公)이 임금을 모시고 경서를 강의하는 자리인 연중(筵中)에
함께 있다가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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