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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렬지사가공주감옥에투옥되어옥고를치렀다고구전되던내용을적시하였다.당시


1956년만 하여도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고, 각종 자료도 미비했지



만,고인의가장큰업적으로조문객의칭송을받았다.다만살림이넉넉지못하여,유승기


님의어머니는 “3년만더사셨더라면따뜻한쌀밥을해드렸을텐데,보리밥찬밥을해올


려서마음이아프다.”라고시아버님의장례식을회상하였다고한다.





유동렬 지사에 대한 서훈 신청은 1978년 12월부터 진행되었다. 운산면 용장리에 살던
장남 유병철(柳炳哲)에 의해서다. 전국적으로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 신청이 이루어지
던 시기였다. 하지만 서훈은 징역형을 받은 애국지사에 한정되었고, 태형 90도를 받은 분
은아직대상자에해당하지못하였다.유병철님은1956년도의추도사와대호지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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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관중이던‘범죄인명부’,그리고함께독립만세운동에참여하였던이석윤(운산면가
좌리 거주)의 증언을 바탕으로 서훈을 신청하였다. 하지만, 징역형 내용은 인정되지 못하
였고,‘형사사건부’가새롭게발견됨에따라태형90도로확정되었다.이에정부는1992년
4월13일대통령표창을유동렬지사에게추서하였다.독립유공자서훈의범위가태형90
도까지확대되었기때문이다.그러나재고의여지가있다.태형90도를받은애국지사대
부분은서산경찰서에서집행에반하여유동렬지사는공주검찰청으로기소되었기때문이
다. 당시 미결수에 대한 검찰의 고문은 혹독했다.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킨 대호지면의 김
도일(金道一) 지사가 5월 26일, 박경옥(朴敬玉) 지사가 6월 5일, 이달준(李達俊) 지사가
8월12일에옥사하였고끝내시신도찾지못하였기때문이다.유동렬지사는이곳에서6개
월이상옥고를치렀다.그리고공주지방법원으로회부되어10월24일재판을받았고태형
90도를선고받은것이다.정부가이분의옥중기간을배제하고태형만을기준으로대통령
표창을추서한것은형평성에맞지않았다.
유승기님은조부이신유동렬지사의행적을더욱소상히알수없음을매우안타까워했
다.유학자로서많은서적과유묵을남겼기때문이다.아쉽게도아들대에서손자세대로
바뀌면서 조부의 유품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유승기 님은 굳은 자긍심으로 하
루하루를보내고있다.본인도수학을전공하는이학박사로서대학강단에서고있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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