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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만세운동의 주도 인사로서 이미 경찰의 수배 대상이었다. 유동렬 지사는 미리 산중으

남,
로 피신하였다. 이에 경찰은 부인을 구타하고 총구를 들이대며 지사의 소재지를 파악하


기위한심문을가하였다.부인에게업힌큰딸은소스라치게놀라울었다.유승기님의구


술에의하면,할머니(부인)가어린큰고모(딸)를업고물동이를길어왔는데,일본순사(경


찰)가물동이를내팽개치며남편을내놓으라고협박하는큰수모를당했다고한다.그후


할머니는 임종이 가까워져 오자, “이 나쁜 놈들이, 나쁜 놈들이”하고 허공을 향해 외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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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전한다.
결국 4월 18일까지 피신했던 유동렬 지사는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만세운동
의주도인사로소위정치령위반및소요죄가적용되어공주검찰청으로넘겨졌고,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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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 검사 기소되었으며 예심이 종결되어 9월 8일부로 공판에 회부되었다. 유동렬 지
사는10월24일공주지방법원에서태형90도를선고받았고,집행후방면되었다.태형90
도는가혹한형벌이었다.태형을집행하면선혈이낭자하고살이문드러져하루에30도이
상 집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태형 90도는 3일에 걸쳐 집행되며 형장을 나올
때는들것에실려나왔다.유동렬지사도매한가지였다.유승기님의구술에의하면,조부
의동생이셋인데,돌아가면서감옥에사식을해날랐다고한다.이들이유동렬지사의귀
갓길을도왔을것이다.
유동렬애국지사는대호지면장정리를떠나운산면가좌리로이거하였다.훈학은계속
되었다.유동렬지사는장정리를포함하여가좌리까지모두5개사숙을운영하였는데,이
때배출한제자만150명이넘는다고한다.평생을양반유생답게꼿꼿한자세와정신을잃
지않으셨다고한다.한편,유동렬지사는신앙생활에도많은관심이있었다.우선독립만
세운동이끝난후부터1930년대까지약10년간,보천교에입교(普天敎)하여활동하였다.
보천교는차경석(車京石)이1921년에창시한증산교(甑山敎)계열의신종교였다.말년에
는 기독교인이 되어 많은 전도 활동을 전개했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유동렬 지사는 1956
년 8월 20일 운산면 가좌리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지사의 장례식에는 인근 교
회의송은광목사가참석하여지사의61년사기록을추도사로낭독하였다.이추도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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