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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당을무시하고표를팔아하루에팔백몇만원의표를판것이었다.
그는 매표도 하고 개표, 검표도 했는데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돈 없이 기차
를 타서 잡고 보면 참 불쌍한 사람들이 많았다. 아주 불쌍한 경우는 훈방을 하기도 했
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은 역전 파출소에 고발했다. 기차 안에는
질서를 유지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공안들도 있었다. 공안들은 두계까지 왔다갔다 했다.
학생들의 무임승차도 많았다. 역 가까이 오면 기차가 서행을 하는데 이때 가방을 먼저
던지고 뛰어내리는 학생이 있었다. 어떤 때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생기기도 했다. 역
업무 중에서 명절이 되면 아주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겼다. 새치기하다 싸움이 나고 쓰
레기는 아무 곳에나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듯 버린 쓰레기가 고역이었다. 명
절이면워낙많은사람이역을찾으니대합실도꽉차고입석표마저없는경우가있었다.
표를못구한사람들도미어터질것같은기차에무임승차하기도어려웠다.
강경역에는 좌석 배정표가 있는데 몇 장 되지 않았다. 한 차에 10장 많으면 20장 정
도였다. 그런데 제일 힘들었던 점은 법원, 검찰청, 경찰서에서 갑자기 좌석을 달라는 것
이었다. 강경역의 화물은 주로 소화물이었다. 양말이나 밀짚모자 그리고 옷감 같은 것이
수송되었다. 소화물은 리어카로 끌고 나가서 차마다 소화물 칸이 있어서 거기다 실었다.
비료나 시멘트 같은 대화물은 화차로 왔다, 옛날에는 고구마가 나갔고 금성산업에서 쓰
던옥수수와비료들이많이왔다.
그의 근무는 아침 여덟 시 반에 출근해서 퇴근은 이튿날까지 24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하루 쉬었다. 그 시절에는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장사하러 다니는 아주머니
들이 대략 삼사십 명 정도가 되었다. 남쪽으로 정읍, 장성까지 북쪽으로는 신탄진, 조치
원, 부강까지 그리고 경부선으로는 옥천, 영동까지 장사를 나갔다. 매일같이 젓갈을 머
리에이고팔러다녔다.또그쪽에서는강경으로젓갈을사러오기도했다.
강경역에서역무원으로일하면서그는자식네명을키웠다.24시간맞교대근무로아
이들 가정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지만 아이들 스스로 잘 커 주었다. 큰 아이는 강경
상고, 수원대학교를 졸업하였고, 큰 딸은 강경여고를 나와 서울 예술대학교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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