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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경에는 정미소가 13개나 있어서 사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성동면, 채운면, 부
여 세도, 전라북도 망성면까지 다 강경으로 모여들었다. 겨울에 세도에서는 금강이 얼면
그얼음위로마차를끌고왔다.
그에게 힘든 일이 많았다. 사람들은 벼 한 가마니만 맡겨도 곡식 주인이라고 행세를
하고 쓸데없이 억지를 부려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오죽하면 정미소 하는 놈은 ‘개○
○’라고 했고, 사람들도 공공연히 “정미소하는 놈들은 개백정만치도 못하다.”라고 했을
까. 돈도 돈이지만 멸시 당하면서 할 일이 아니었다. 벼를 말리면 주인은 벼 한 가마 나
르는데 돈이 얼마니까 그걸 한 푼이라도 덜 들이려고 하고, 거기다가 길은 푹푹 빠지지,
논바닥은 질어서 들어가지 못하지, 먼 데서 밀고 나오는데 인건비는 또 들어가니 애로가
겹쳤다. 그래도 곡주들은 필요하면 돈을 빌리러 정미소로 왔다. 많이 빌려 주었다. 이자
는받지도못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낮에 전기를 주지 않아서 밤에만 기계를 돌렸다. 그런데 공출을 내지
않으면 기계도 못 돌리게 했다. 일본 사람들은 강경에서 나는 벼를 거의 다 공출로 가져
갔다. 공출을 내지 않으면 집을 뒤지고 거름 자리까지 팠다. 어떤 사람은 겨울에 남교리
철교 밑에 가마니에다 벼를 넣고 물속에 넣어 두었다. 공출 나갈 때는 쌀값을 제대로 쳐
주지도 않고 반값에 빼앗아 갔다. 공출이 끝나면 숨겨 놓은 벼 한 가마니나 두 가마니씩
쪄 갖고 갔다. 쌀이 없어서 굶는 사람이 무지하게 많았다. 먹을 것이 없으니 깻묵과 만주
에서나는콩을먹었다.
강경은 배가 많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군산으로 배 타고 수학여행을 다녀올 정도
였다. 6학년 때 선운회사 배를 타고 군산에 갔는데 하루에 두 번씩 물길 따라서 가는 여
객선을 타고 갔었다. 지금은 공원이 되어 버린 강경포구가 배 타는 곳이다. 군산까지 배
를 타면 한 두세 시간 걸렸다. 수학여행이라고 군산에서 배에 내려서 밥만 먹고 물때를
맞춰바로강경으로돌아왔다.
한국전쟁 때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아버지와 형이 공무원 일을 하셔서 연무대로 피난
갔다. 쌀을 구할 수가 없어서 중학교 2학년인 어린 나이에 쌀을 등에 메고 하루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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