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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겼으나계사년(중종28,1533년)에풀려나고향예산으로돌아와부모묘에곡
을 하고 시묘살이를 했다. 부모상은 남해 유배 때 당하여 슬픔이 더하였다. 조석
으로 통곡을 하니 눈물이 초목을 적셔 다 말라 죽었다. 공의 필력은 강건하여 종
사들이 따랐고 왕은 소문을 들어서 화려한 필적을 알았으나 필적은 없고 죽은 이
후에드물게세상에전한다.
국조인물고(상)에도위의내용으로비문에새겨져있다.
이름은 구요, 자는 대유이고 광산인으로 기묘선현에 전하며 자암 김선생이
라 칭한다...중략...대신 정광필의 사상을 주장하다 전국 사방으로 분산되어 유
배되었고 자암은 개령으로 부처되었다가 수개월 후에 죄가 추가되어 남해로 유
배되었다. 정암과 충암도 죄가 가중하게 추가된 것은 애통한 일이다. 선비들은
충직의 길을 다하여 선정을 고집하였지만 부득이 학문이 쇠퇴하고 재앙이 내려
죽을땅에유배되었다...하략.라고기록하고있다.
그리고 기묘록 보유 상권 김구 전에 배소를 개령에서 남해 절도로 옮기면서
일어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경진년 봄에 부인은 한 필의 말로 짐
한 바리와 창두(종) 5~6명을 거느리고 공의 배소를 뒤 따라갔다. 이때는 김대
성이 도망 중이라서 탐색이 엄중하였다. 갈림길을 지키는 군졸이 서로 바라보
면서 수직할 정도이고 무릇 나그네가 있으면 모두 수검한 뒤에 보내었다. 경상
감사 반석평이 길에서 여행하는 어떤 부인이 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길
가에 머물러 사정을 물어본 다음 민망하고 측은하게 여겨서 양식과 물품을 찾
아 주고 또 하도로 가는 영리를 시켜 배행하게 하였다. 공은 드디어 죽림 속에
집을 짓고 살았다.”김구가 남해 적소로 옮길 때 부인도 같이 왔고 김구가 거느
릴수있는하인도5~6명정도가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끝으로1591년(선조24)가선대부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동지
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에추증되었다.
1장자암김구│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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