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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주임 견엽이라는 사람과 부읍장 조선인 박명진 그리고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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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온양읍 행정을 수행하고 있었
당시 온양읍 직원들의 근무상황은 매일처럼 상부관청인 아산군과 충남도청 직원들의 빈번한 출장으로
이들과 같이 각 리에 나가 각종 독려를 주임으로 하여 아침에 출근한 직원들은 오후만 되면 군청 각과
에서 출장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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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과 합세하여 읍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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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각 리에 출장하게 되는 고로 오후에는 항상 읍사
무소가 공백상태였었다.
그리고 온양읍 사무소의 예산형편을 보면 비교적 예산이 풍부한 편이었고 일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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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한 수단으로 자행한 소위 노무동원에 있어서의 인력공출이라는 명목과 역시 전쟁수행용으로 착취
한 식량 공출 및 각종 공출 우육의 공출도 포함 등의 착취수단을 강행하는 일에는 항상 모든 경비를
보조하여 자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우육공출이나 노무동원 한해대책 등 당시의 일본인들이 자행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 째 육우공출에 있어서는 매년 봄에 육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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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이는 당시의 형편에 비해 대단한 공출량 이었다
둘 째 노무동원에 있어서는 당시 아산군과 충청남도에 총동원과를 설치하고 각 읍면에는 노무동원계
를 설치하였는데 읍면의 노무동원계에는 주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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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100
명 내
외의 인원을 차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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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면 마치 주민들과 공무원들과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읍면
직원들이 노무출동지령을 당사자의 가족에게 전하기 위해 촌락에 출장을 가게되면 어느 틈에 노무동원
대상자인 젊은이에게 그 가족들이 사실을 알려서 피신하게 하자 읍면 직원들은 야밤을 이용하여 당사
자의 집을 급습 강제로 끌고 가는 일까지 벌어지곤 하였다
셋 째 한해대책에 있어서는 늦봄부터 가뭄이 시작하여 모심기가 늦어질 것이 예상되면 요즘처럼 도
랑 파기 등을 하여 긴급한 상황을 극복하곤 했는데 이 때는 부락민들을 강제로 총 동원시켜 수로를 몇
씩 만들어 수천
에 달하는 모내기를 마치게 하였고 심지어는 풍기리 상류의 사금과 관토로 물
이 고여 있는 곳에 전기양수기를 동원하여 물을 퍼내어 풍기 권곡 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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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하였으며
월 초순까지도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오래도록 계속되는 때에는 모든 논에 지금처럼 대
파를 실시했다 종자로는 메밀 수수 쑥 야채 산나물 등을 심어 재배토록 하였는데 극심한 가뭄으로
인 흙덩어리가 호미 등으로는 깨어지지 아니하여 대파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끝내는 어떠한 강제수
단을 적용하여서라도 대파를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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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어 치나 자랐는데도 이를 뽑아 없애고 그 자리에 모를 심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상적인 일이 있을 때 무엇보다도 빠른 시간 내에 모를 공급하는 수송수단이 문제
가 되었는데 당시 우마차의 동원관리를 경찰이 담당하고 있어서 경찰로 하여금 농우 동원을 일체 관장
하고 모를 심는 일에 우선하도록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농촌에는 노력동원 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동원되어 농촌 인력이 부족하게 되므로 온양읍내의
상업종사자 등이 모심기에 강제로 총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심어진 모는 앞서 대파하던 메밀
수수 등에서 생긴 진딧물 등 해충 때문에 모는 잘 자라지 않고 자연히 수획량도 떨어지게 되어서 가을
추수기에는 형편 없는 양의 농작물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이 당시의 온양읍민들의 동태를 보면 매일같이 식량배급을 통해 식생활을 영위해야 했기
때문에
70 80
명씩 줄로 늘어서 식량 배급 전표를 받아 지정된 배급소에 가서 식량을 타게 되어 있었
으므로 각 사무소에는 식량배급전표를 받기 위해 몰려드는 많은 주민들로 항상 붐비기 마련이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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