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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가 섭섭하다며 연연한 정표로 예물을 주기도 했다. 이 사람은 대체로 문장에 능
했고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는데, 중국 사신 중에 서기(書記)가 된 장방달이란 사람
이다.
이 해 가을에 역적 이몽학이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홍산, 임천 두 고을을
함락 시키고, 수령을 결박하여 무지한 백성들을 위협하니 호서지방 전체가 크게 동
요되었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홍주성은 작고 낮아서 이몽학의 반란군을 맞아 대항하기 어려우니, 성을 버리고
임금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나는 왕명을 받아 이 고을을 다스리는 것인데, 어찌 감히 한 발자국이라도 홍주
땅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이냐.”
하고 죽음으로써 맹서하여 지킨 결과 마침내 홍주성을 완전히 수호하고 이몽학의
반란군을 섬멸하였다. 이 일은 홍양청난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기해년(선조 32년, 1599년)에 벼슬의 임기가 차서 귀향하는데 이삿짐이 아무것도
없었다. 홍주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보리 수십 석을 보내왔으나 받지 않고 돌
려보냈다. 또 벼슬을 제수하는 명령이 여러 번 내려졌으나 그때마다 받지 않고 모두
물리쳤다. 경자년에 비로소 첨지의 벼슬을 받아들였다. 얼마 뒤에 해주목사(海州牧
使)를 제수하였는데 이조의 낭관으로 뽑힌 자가 도관찰사와 서로 내통하여,
“왕자와 귀주(貴主)들의 12궁(宮)이 모두 이 한 고을에 모여 있으니, 목사 노릇하기
가 여간 괴롭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사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라고 하므로 선생은,
“일이 어렵다고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하된 자의 직분이다.”
라 말하고 이튿날 조정을 하직하고 해주에 부임했다. 이에 아전들이,
“먼저 제궁에 인사를 드리고 난 뒤에 관아로 들어가는 것이 전례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하매, 선생은 손을 내저었다. 또 현관(縣官)이,
“지난날에 부임했던 목사들은 반드시 제궁에 물건을 바치고 잔치를 벌여 왕자와
의빈(儀賓)들을 위로했는데, 공은 어찌하여 그리 하지 않는가.”
하고 묻자 선생이 대답치 아니하니, 또 다시 연회를 강권하매 선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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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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