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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병환(秉煥), 병순(秉淳), 병현(秉賢), 병철(秉喆) 등 네 아들을 두었고 주로 선장면 일대에 후손
들이 많이 퍼졌다. 그의 묘는 선장면 신성리 삼봉산 자락 종산에 있다.
[39] 신창맹씨 맹희도
| 孟希道
<1337년(충숙왕6년)~1423년(세종5)추정>
고려 말 ~ 조선 초의 문신·학자이며 신창맹씨(新昌孟氏) 3세로 아산시 지역, 배방읍 중리 입향조
이다.
그는 중시조 맹의(孟儀)의 손자이자 두문동 72현인 상서(尙書) 맹유(孟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능
성구씨(綾城具氏)이다.
호는 동포(東浦)·호전(湖田)이다. 주로 개경에서 살았으며 정몽주·권근 등과 절친하게 교유했다.
1365년(공민왕14)에 문과에 급제하고 수문전제학(提學-정3품) 등을 지냈다. 1388년(우왕 14) 위화
도 회군 이후 아버지 맹유가 서두문동으로 들어가자 그도 동두문동에 은거했다. 이로 인해 후손들은
그를 두문동 72현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아버지가 순절하자 가족을 이끌고 맹씨들의 옛 근거지인 충
남 서천 한산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부친의 가묘를 모시고 3년상을 마친 뒤 1392년경에 온양 금
곡동(현재의 아산시 배방읍 중리)으로 와서 고려 말의 명장 최영(崔瑩)의 집(현재의 고택)에 자리 잡
고 살게 되었다.
그 후 출사를 거부하고 오직 학문 연마와 강론에 전념하였다. 이로부터 온양 일대에 성리학이 본격
적으로 전파되었다고 본다.
한편 그는 효자이기도 하여 부모상을 당하여 직접 흙을 져다가 봉분을 만들고 여막에서 3년 시묘를
하니 흰 새가 날아와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이미 생정려(生旌閭-살아 있을 때 내린 정려)를 내려 서
천 한산에 정효비(旌孝碑)가 1392년(공양왕2)에 세워졌다. 조선 태조도 즉위 후 다시 생정려를 명하
여 배방읍 중리에 정문이 세워졌고 효자비와 함께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효행은《동국신속
삼강행실도》
에 아들의 효행과 함께 수록되어 귀감이 되고 있다.
묘는 아산시 법곡동 건좌에 있는데 개성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 흥양조씨(興陽趙氏)를 이장했
던 곳이다. 사후에 후학들이 그의 충절과 학덕을 기려 자하사(紫霞祠-또는 五峰祠오봉사)를 세워 배
향해오다가 1634년에 정퇴서원(靜退書院)이 건립되자 그곳에 모셨다. 그러다가 1790년(정조14)에
위차문제가 발생하여 분쟁이 지속되었고 1837년(헌종 3)에 따로 금곡서원(金谷書院)을 세워서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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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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