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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웅님은 유한종(劉漢鍾, 1901~1950) 애국지사의 아드님이다. 본적은 서산시 해미


면조산리238번지이며,본관은강릉이다.유한종애국지사는1919년3월24일일어난해



미공립보통학교(현해미초등학교)학생만세운동에주도적으로참여한후옥고를치렀다.


지사께서는다행히주동인물에서제외되어체형을받지않았고,불기소처분으로석방되


었다. 이 때문에 징역형을 수형한 동료 학생과 달리 2019년에 와서야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게되었다.당시만세운동을주도한학생들은모두16명내외로밝혀지고있는데,대통



령표창 이상의 서훈을 받은 분은 현재까지 7명으로 아직도 9명이 미서훈 상태로 남아 있
다.미서훈의원인은후손을찾지못한경우가대부분이다.
3.24 해미공립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은 서울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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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다.만세운동물결이전국방방곡곡에서메아리칠때,해미에서도3월19일독립만
세운동이일어났다.남상철(南相喆)이주도한것으로알려진만세운동이었다.하지만,파
급력은크지않았고,남상철도일본경찰에붙잡히면서만세운동은진정되었다.이때해미
면에는 이계성(李啓聖, 1900~1976)이 저축조합 서기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천주교도
인한병선(韓炳善)과정(鄭)신부로부터독립선언서와태극기를입수하였고,자신의사무
실에서다량인쇄한후에만세운동의기회를엿보고있었다.
3월23일,해미공립보통학교제5회졸업식이거행되었다.졸업생은10명이었고,반장은
김관룡(金寬龍, 1900~1975)이었다. 마침 졸업생을 축하하는 고별식이 다음 날인 3월 24
일 시내 음식점에 개최되었다. 이계성은 해미공립보통학교 4회 졸업생으로 1918년 3월에
이미 졸업한 선배였다. 그는 이 고별식을 만세운동의 좋은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는 해미
면 동암리에 사는 김관룡을 찾아갔다. 김관룡은 이계성의 만세운동 제안을 흔쾌히 수락
하였고, 뒤이어 같은 졸업생인 유세근(柳世根), 김연택(金然澤)의 찬동도 얻어냈다. 이들
은 3월 24일 저녁, 고별식이 열리는 박인양(朴寅陽)의 음식점으로 갔다. 김관룡은 연회가
종료되는시점을이용하여동기생과선후배들에게만세운동을일으킬것을강권하였다.
유승웅 님의 부친인 유한종 애국지사는 김관룡과 동기생인 졸업생 자격으로 연회에 참
석하였다. 그리고 김관룡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만세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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