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89페이지

37페이지 본문시작

옛날에 철장 모랭이였다 돌모퉁이가 철장 같아서 불리게 된 것이며 지금은 약간의 흔적
만 남아 있음.
군량들
군량미를 저축했었다는 유래가 있는 들로 그밖에 솔모로란 들도 있음
주절바위
산허리 절에 있는 바위로 크기가 보통 바위보다 몇배나 큼
불당골
원당이 뒷편이 있는골 절이 있었음
구절바위골
원당이 동쪽에 있는 골 옛절터가 있음
솔모로
원당이 앞에 들
원당이 방죽
원당이 동북쪽에 방죽이 있음
7)
전 설
처녀바위에 대한 전설
도고면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넓은 농토에 물을 공급해 주는 큰 저수지가 있다 석
당리와 신유리를 양쪽에 그리고 앞에는 시전리를 끼고 위치해 있으며 옛날 일제시대 일본
인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을 착취하고 농민들이 지어 놓은
농작물을 착취해 가기 위해 거대한 저수지를 설치한 것이다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농토의
젖줄기의 하나가 되었지만 신유리쪽인 남쪽은 저수지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리 위험
지구는 없지만 석당리 쪽인 북쪽은 산을 깎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경사가 급하고 석당리
아이들은 학교에 갈때 그곳을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위험지구인 둑을 따라 계속 가면
가장 위험한 곳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이 바위 밑을 보면 마치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무
시무시한 느낌을 받는다 바로 이 바위에서 옛날부터 자살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가기 꺼린다 전해오는 말로는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는 바위가
있는 곳에 무덤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그대로 파헤쳐 저수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 원혼
이 이 바위에 서려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렇게 해서 이 바위를 처녀바위라 하
게 된 것이다.
8)
전통놀이 및 집단행사
지금으로부터
30
년전만해도 노신제와 성황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게 되
었다 노신제는 현재 마을 회관 옆으로 지금은 밭이 되어 버린 자리가 노신제를 지냈던 장
소로 그때만 해도 매우 엄격하게 지냈고 음력 정월 초순에 지내곤 하였다 성황제는 대부
분 개인적으로 가서 제를 올리는데 지금도 성황나무는 남아 있어 지금도 가끔 개인적으로
제를 올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성황나무는 마을회관 앞에 있다
9)
특별하게 소개할 만한 인물
우국지사 성달영 선생
독립운동가 자는 경백 호는 비파헌
본관은 창령 문간공 우계 성혼선생의
12
손으로 고종
10
(1873) 6
15
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은 천품이
온후강직
하고 인애
와 절의
를 숭상
하는 기품
을 지니었다
고종
42
(1905)
일제의 총검
아래 을사보호조약
이 체결
되자
선생은 친제
성문영
과 함께 분연
히 일어나 망국적조약
무효
와 파기
를 선언하고 김재원 선생등 우국지사와 협력하여 홍주를 거점
으로 의병을 일으키더니 의병장
에 추대
되어 맹약분투
하였으며
이때에 김기우
박제현
박창로
박윤식
등 제의병장
도 모두 동렬
에 참가하였다 선생은 망국의 비운
에 임하여 구국운동의 선
봉이 되어 의병을 지휘
하면서 항일투쟁
을 전개
하던 중
1913
년에 채
기중
유장렬
선생 등에 의하여 풍기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
에 자진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적극
확대
하였다
1915
년에 대한광복단은 대한광복회
로 개칭되었고 동년
8
25
일에는 대전달
성공원에 수백명의 동지
가 회합
하여 독립운동
을 위한 새로운 조직과
활동방안
을 논의 하였으며
, 1916
년에는 중국에서 활약하던 노백린
좌진
장군 및 김한종
박상진
채기중
장두환
의 지사들을 맞이하여 다시 대한광복단이라 개칭한 다음 조직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
여 수적 일제를 구축
하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신명을 바칠 것을 서고
하고 혈맹

37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