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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의 상소를 보고 처음에는 놀라지 않았는데, 성상께서 상소 문제를 용납하
셨을 뿐만 아니라 큰 고을의 목사로 임명하시니,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는 말은
가히 바꿀 수 없는 말이로다.”
하였다.
갑오년(선조27년, 1594년)에 광해(光海)가 왕세자로 나라의 일을 임금을 대신하여
살폈다. 이때 왕세자가 전주에서 홍주로 옮겨왔다. 따르고 호위하는 문무관원들이
각각 처자를 거느리고 오는 바람에 횡령이 매우 심했다. 선생은 일체 법도대로 행하
며 정해진 것 이외에는 한 푼도 더 주지 않았다. 궁인과 총애를 받는 자들이 앞 다투
어 미워했으나 선생은 돌아다보지도 않았다.
이때까지도 왜적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충남 서북부지방
의 바닷가에 사는 수령들은 경쟁적으로 배를 준비하여 처자들을 보존할 계획을 세
웠다. 그러나 선생만은 초연하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어떤 이가 선생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웃으면서,
“고을을 맡은 신하는 고을을 위해서 죽는 법이다. 자기가 죽는 것도 돌아볼 수 없
는 처지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있단 말이오.”
하였다.
병신년(선조 29년, 1596년)에 일본으로 가는 중국 사신 이종성과 양방형이 충청도
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은 도차관(都差官)으로 전의에 가서 양식을 공급하는
일을 주관하여야 했다. 순찰 이하 2,000명의 관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있었
다. 한 중국 장수가 불쾌하게 생각하여 군교들 중에서 사나운 자를 불러 모아 행패
를 부리게 했다. 온 좌중이 창피를 당하고 놀라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선생
만은 태연한 모습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중국 장수가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군교
를 좇아 보내고 종이와 붓을 가져다가,
“내가 천하의 선비를 많이 보아 왔으나 공과 같이 공부가 완숙한 자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을 받는 이는 드물게 본다.”
라 써 보이며 선생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쓰다듬으면서,
“항상 이렇게 꿇어앉아 있으면 다리의 힘이 손상될까 걱정스럽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때부터는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다가, 이별하기에 이르러서는 헤어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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