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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5세기 말 이후, 내포 지방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내포 지방 사족 집단의 구성과 농업 경영
중국 문화의 초입지(初入地)로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한 선진적
의 사회적 변천 등으로 보아서, 이 지방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인 문화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와 중국을 연결하던 항로
성향을 민중의 입장에서 크게 걸림이 없이 수용하고 이를 생활
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의 미비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
화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이 지역의 실학적 학풍과 천주교의 수
으나, 현존하는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 서
용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대개 17세기 말부
산 운산의 용현계곡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예산 화전리의 사
터 19세기 초까지의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학풍인 실학은 당시
면석불입상 등은 이 지역이 중국 선진 문물이 수입되는 경로였
의 시대적 풍조로는 진취적인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음을 대변해 준다. 이들 내포 지역의 마애불은 모두 사람 키 이
근기(近畿) 남인 학자들이 선도했던 실학 운동은 내포 지방에
상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불상들로써 당시 이러한 규모
서도 전개되었다. 여주이씨(驪州李氏) 성호(星湖) 이익(李瀷,
의 불상 제작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공주나 부여 어디에서도 이
1681~1763)의 족질(族姪)들이 덕산 지방(현 고덕면 상장리)에
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백제 문화의 중심지는 백제 해상 세력
많이 살았는데, 이병휴·이용휴·이가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림4]태안마애삼존불
의 근거지였던 내포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의 조카이자 문인인 이병휴(1710~1777)는 이른바 성호좌
[그림6]예산사면석불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을 때에도 내포
파(星湖左派)의 수장이다. 이병휴와 이용후의 실학은 천주교를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임존성(任
신봉했던 이가환과 외손인 이승훈 등에게 전수되었다. 이 같은
存城)은 흑치상지(黑齒常之)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백제 부
내포 지방의 실학풍은 개방 성향을 가진 이 지역에서나 가능하
흥 운동의 대표적인 근거지였고, 또한 부흥 운동의 정신적 지주
였던 것이다.
였던 도침(道琛, ?~661)은 수덕사 승려로 추측되고 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모든 생활이 유학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내포 지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하층 구조의 민중들도 대체로 사족
지역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상왕산
의 생활 관습을 벗어나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천주교 수용은
계곡에 보원사를 크게 중창해 짓고 화엄종찰로 삼아 이곳 불교
이단(異端)이면서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를 장악해 갔다. 그러나 이곳 백성들의 반신라적인 감정은 더욱
호서 지역에 천주교가 알려진 것은 한국천주교회가 창설
골이 깊어갔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 왕조의 주도 이념이었던
된 바로 직후, 늦어도 1785년 무렵이었다. 내포 출신으로 한
[그림5]서산마애삼존불
화엄종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새 사회를 건설해 가
국천주교회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이존창(李存昌,
려는 신사조 운동이 맨 먼저 일어나게 된다. 이때 앞장선 인물이
1759~1801)이 내포(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로 다시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의 실질적 개산조 보조선사
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에 이어 그 다음으로 내포에 천
체징(體澄, 804~880)으로 그는 가야산 보원사 계단에서 계(戒)
주교가 수용된 것이다. 내포에 자리 잡게 된 천주교는 서울과 다
를 받은 내포 출신 인물이고, 성주산에서는 낭혜화상이 성주산
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서울과 같이 양반 · 중인
문을 개설하였다.
층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내포 지역에서는 일반 양인(良人)이
7.내포의뿌리,예산의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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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조선 후기에 이르러 내포 지방 사족 집단의 구성과 농업 경영
중국 문화의 초입지(初入地)로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한 선진적
의 사회적 변천 등으로 보아서, 이 지방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인 문화 지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와 중국을 연결하던 항로
성향을 민중의 입장에서 크게 걸림이 없이 수용하고 이를 생활
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의 미비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
화하였다. 이러한 측면은 이 지역의 실학적 학풍과 천주교의 수
으나, 현존하는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 서
용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역사에서 대개 17세기 말부
산 운산의 용현계곡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 예산 화전리의 사
터 19세기 초까지의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학풍인 실학은 당시
면석불입상 등은 이 지역이 중국 선진 문물이 수입되는 경로였
의 시대적 풍조로는 진취적인 성향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음을 대변해 준다. 이들 내포 지역의 마애불은 모두 사람 키 이
근기(近畿) 남인 학자들이 선도했던 실학 운동은 내포 지방에
상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규모의 불상들로써 당시 이러한 규모
서도 전개되었다. 여주이씨(驪州李氏) 성호(星湖) 이익(李瀷,
의 불상 제작은 백제의 수도가 있던 공주나 부여 어디에서도 이
1681~1763)의 족질(族姪)들이 덕산 지방(현 고덕면 상장리)에
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백제 문화의 중심지는 백제 해상 세력
많이 살았는데, 이병휴·이용휴·이가환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그림4]태안마애삼존불
의 근거지였던 내포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익의 조카이자 문인인 이병휴(1710~1777)는 이른바 성호좌
[그림6]예산사면석불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멸망당했을 때에도 내포
파(星湖左派)의 수장이다. 이병휴와 이용후의 실학은 천주교를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임존성(任
신봉했던 이가환과 외손인 이승훈 등에게 전수되었다. 이 같은
存城)은 흑치상지(黑齒常之)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백제 부
내포 지방의 실학풍은 개방 성향을 가진 이 지역에서나 가능하
흥 운동의 대표적인 근거지였고, 또한 부흥 운동의 정신적 지주
였던 것이다.
였던 도침(道琛, ?~661)은 수덕사 승려로 추측되고 있다.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모든 생활이 유학의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내포 지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하층 구조의 민중들도 대체로 사족
지역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상왕산
의 생활 관습을 벗어나지 않았던 당시 사회에서 천주교 수용은
계곡에 보원사를 크게 중창해 짓고 화엄종찰로 삼아 이곳 불교
이단(異端)이면서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를 장악해 갔다. 그러나 이곳 백성들의 반신라적인 감정은 더욱
호서 지역에 천주교가 알려진 것은 한국천주교회가 창설
골이 깊어갔다. 이곳에서는 통일신라 왕조의 주도 이념이었던
된 바로 직후, 늦어도 1785년 무렵이었다. 내포 출신으로 한
[그림5]서산마애삼존불
화엄종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 새 사회를 건설해 가
국천주교회의 창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이존창(李存昌,
려는 신사조 운동이 맨 먼저 일어나게 된다. 이때 앞장선 인물이
1759~1801)이 내포(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로 다시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의 실질적 개산조 보조선사
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서울에 이어 그 다음으로 내포에 천
체징(體澄, 804~880)으로 그는 가야산 보원사 계단에서 계(戒)
주교가 수용된 것이다. 내포에 자리 잡게 된 천주교는 서울과 다
를 받은 내포 출신 인물이고, 성주산에서는 낭혜화상이 성주산
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서울과 같이 양반 · 중인
문을 개설하였다.
층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내포 지역에서는 일반 양인(良人)이
7.내포의뿌리,예산의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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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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