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08페이지

35페이지 본문시작

2019
2019
제53호
제53호
지역학칼럼
예산학특강-예산지역의3·1독립운동
보했다.이들학생들의독립만세운동은각지역에서전개된최초의독립만세운동으로그지역의독
등군내예산면,대술면,신암면,신양면에서횃불독립만세운동이전개되고,4월4일대술산정리,덕
립만세운동에선구적역할을했다.
산읍내리,광시하장대리에서독립만세운동과광시,대흥대율리,신양연리등예산군내18곳에서
셋째로연령층으로3~40대인사들이독립만세운동을주도했다.주도인사들가운데덕산의최승구
횃불독립만운동이 전개되었으며, 4월 5일 예산 읍내리, 광시 광시리와 하장대리에서 독립만세운동
(23),대흥의정인하(29)를제외하고30대와40대의중장년층이주민들과군중들을이끌고독립만
과예산읍내4개산,삽교목리에서횃불독립만세운동이전개되었다.
세를외쳤다.30대로고덕의장문환(33),신장의박대영(37),광시의박성식(37)이고40대로고덕
일곱째로 횃불독립만세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3월 중순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중부지방으로 중심
의 최문오(44), 신양의 성원수(46), 대술의 민제식(49) 등이 있다. 대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20
으로 확산되었고 그에 따른 일제의 탄압도 심해지면서 3·1독립운동에 있어 새로운 발전적 형태로
세전후로독립만세를외친것과같이10대의학생들이나20대청년들이독립만세운동을주도적으
등장한것이횃불독립만세운동이었다.3월23일충북청주와충남조치원·연기일대에서각면,각
로이끌거나적극적으로참여한다른지역에비해예산지역은중장년층의활동이두드러졌다.특히
마을,군계(郡界)와도계(道界)를넘어연합독립운동으로횃불독립만세운동이시작됐다.이독립운
이들은 20대와 30대에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 당하고 이어 한 집안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동은이후연기지역을중심으로전개되다가점차충남의산악지역을중심으로아산,홍성,청양등
야하는시기에일제의식민지직접지배체제를겪으면서독립에대한열망이어느세대보다도강했
59)
지에서활발히전개됐다.
을것으로보인다.따라서이들은독립을주장하고독립만세를외치는데앞장서게되었다.
4월 3일 예산 신례원리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주민들이 횃불독립만세를 외쳤고, 군내 대술면, 신암
넷째로주도인사들은명문집안의후손으로지역적기반을갖고영향력이있었던인사들이었다.박
면,신양면에서도면민들이횃불독립만세를불렀다.이어4월4일에는오후8시부터광시면에서횃
대영은영해박씨로조선전기에증판중부박치안(朴致安)이사육신사건이있은후낙향하여신장
불독립만세를불렀고대흥면과신양면에서도주도인사들이주민들을이끌고마을산에올라횃불독
면 죽천리로 입향해 세거한 후손이다. 장문환은 인동 장씨로 조선 중기에 삽교 평촌리로 입향해 13
립만세를외쳤으며,군내예산면,오가면,신암면,고덕면등각마을의18곳에서횃불을올리고독립
대째세거하고있던집안의인물이었다.성원수는창녕성씨로중선중기삼괴당성흔(成欣)이광해
만세를고창했다.그리고4월5일에는예산읍내주위의4방향의산에서,삽교목리에서도마을뒷
군의학정을피해신양연리(귀곡리,불원리)로입향해14대째세거하고있었다.민제식은여흥민씨
산에서주민들이횃불독립만세운동을전개했다.이같이예산지역에서는4월3일에서5일까지3일
집안으로대술산정리에서세거하고있던인물이었다.이들은거주지마을에서여러대를거쳐세거
간에걸쳐연속해횃불독립만세운동을전개했다.
해온집안의후손으로유학적학풍을가진인사들로보인다.또한이러한지역적기반을갖고지역
여덟째로군내12개면의면민들이독립운동에참가했다.3·1독립운동의전개가기록된면으로예
민이나마을주민들에게상당한영향력을미치는인사로지역의독립운동을이끌었다.
산면, 대흥면, 고덕면, 대술면, 덕산면, 광시면, 신양면, 신암면, 오가면, 삽교면 등 10개면이다. 하지
다섯째로독립만세운동에서주도인사나참여인사로종교인들도활동했다.3월31일예산읍내독
만봉산면,응봉면면민들도일제에게탄압을당한수형관련기록이남아있다.이로써12개면의면
립만세운동에서 야소교(기독교) 신자 부인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침으로 시장 군중들이 호응해 독립
민들은 독립만세를 외치거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3·1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이 독립
만세를함께외쳤다.이외3월29일덕산시장에서천도교교도들이,4월3일고덕한내(대천)시장
운동으로예산헌병분대나헌병주재소헌병들에게현장에서탄압을받아사상자가발생했고체포구
에서천주교신도들이독립만세를외쳤다고전해진다.
금되어갖은고문을당했으며즉결처분으로태형을맞았으며검사국에서불기소처분으로석방되기
여섯째로독립운동은짧은기간에집중적으로전개됐다.충남지방의3·1독립운동은3월27일부터
도했으나재판에회부되어형옥살이를해야만했다.
4월8일까지13일동안활발하게전개됐다.특히3월31일부터4월4일까지사이에가장치열하게
독립만세를외쳤다.예산지역은3월3일최초로독립만세를외친후3월13일대흥공립보통학교학
생들이독립만세를외치고3월9일과21일2차례의독립만세운동을시도하였지만일제헌병들에게
사전에 탐지되어 진압됨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3월 31일 예산 읍내에서 독립만세운
동이재점화되면서4월3일부터5일까지3일동안집중적으로예산군내전체12개면에서독립만세
58)
운동과횃불독립만세운동이일어났다.
4월3일고덕대천리에서독립만세운동과예산신례원리
58)같은사례로인접한청양군에서도4월3일운곡미량리에서사전에제지된후4월5일부터9일까지5일동안집중적으로3·1독립운동을전개했다.
59) 김진호,2019,334~8쪽참조.
34
35

3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