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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성종9~중종38)은젊었을때생원시와진사시에모두장원하였는
데, 출방할 때에 한 사람이 양쪽에서 장원이 될 수 없다고 하여 진사에는 2등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시관이 되어 김구가 생원시와 진사
시에 모두 장원을 하자, 여러 시관들이 또 말하기를,“한 사람이 장원이 될 수
없다.”라니, 김안국이 분연히 말하기를,“왕희지의 필법과 한퇴지의 문장으로
무엇이불가하겠는가.”하여,드디어양쪽의장원이되었다.《기재잡기》
경진년(1520년) 봄에 공의 부인 김해 김씨가 한 마리의 말에 한 바리의 짐
을 식도 5~6명을 데리고 공의 귀양지를 좇아갔다. 이때는 김식이 도망 중에 있
어서 현상 수배가 날로 엄하여 길가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지키며 여행자는 모
두 수색 검문하고서야 보내주었다. 경상 감사 반석평이 길가에서 한 부인 일행
이 붙잡혀서 떠나지 못하고 길가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고 캐물어 사정을 알고
측은하게 여겨 양식과 물건을, 또 영의 아전을 시켜 일행을 호송하도록 했다.
공은드디어죽림에집을짓고살았다.《당적보》
공의문장은기이하고필력이굳세며위나라의종유와왕희지의필법을사모
하였다. 일찍이 중국 사람이 자기 글씨를 귀중하게 여긴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끊고쓰지않아서필적이세상에전하는것이드물다.《당적보》
공은기예에통하지않은것이없어서장악원정에임명된것도음률을잘알
았기때문이다.
공의행서는볼만한것이없고큰글씨로된행서와초서는법도가매우훌륭
하였으나, 필력은 둔하고 느렸다. 그러나 일찍이 유세모의 집에서 대폭 하나를
보니뛰어난솜씨여서,그또한쉽게말할수없다.《원교필결》
공의 필법을 인수체라고 했는데, 이는 공이 인수방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명현록》
자암은 1507년(중종 2). 20세에 소과인 생원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는
데, 시험지의 답을 본 시험관이 말하기를“한퇴지의 작법이요 왕희지의 서체”
라 칭찬하였다. 한퇴지는 당나라의 문학자이다. 글이 자유롭고 논설을 전개하
면서 사실을 기술하는 문체였다. 왕희지는 동진의 서예가인데 당태종이 왕희지
를 존중하여 글씨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친필은 없고 탁본만 전하고 있다. 이토
록 자암의 글을 보고 극찬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자암의 문체와 글씨가 독
특하였을 뿐 아니라, 시문들을 볼 때 그때그때의 사실을 잘 묘사하였고 소재를
삼은 것 같다. 특히 자암의 서체를 서울 인수방에 살았다하여 인수체라 하는데
34│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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