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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원지
중부의 무리가 문관을 죽이는 것이었다. 선
을 집필할 때 선생은 국사를 논하니 사실대
생은 여러 가지 계책(計策)을 세워 많은 사
로 집필될지 걱정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최
람들을 구하였다.
세보와 같이 편찬에 착수 의종실록을 완성
명종 4년에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전직
하였다.
하시고 추밀원(樞密院) 지주사(知奏事)가
명종 17년에 중서 문하양성판병부사(中書
되었으며 다시 지원사(知院事)에 올랐다.
門下兩省判兵部事)를 겸하고 이어 권판상서
명종 8년에 선생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부사(權判尙書 吏部事)가 되었다.
“과거에는 연등(然燈)놀이를 이월 보름에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세상이 어수선하니
행하였으나 근래 전 왕의 제사로 정월에 행
공부상서(公部尙書) 조원정이 득세하여 공
하게 되어 음양이 부조 하오니 전과 같이 행
금을 포탈하였다. 이에 선생은 그 죄를 아뢰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여 왕조의 번영
어 그의 아들을 좌천시키니 조원정이 앙심
을 기원함으로써 왕에 대한 충성을 보였다.
(怏心)을 품고 선생을 쫓아내려고 계략을 짜
명종 9년에 내관의 모략으로 인하여 잘못
고 칠십여 명을 보내 담을 넘어 궁에 들어와
한 일을 거론하니 선생은 스스로 임금에게
추밀사(樞密使) 양익경(梁翼景)을 죽였다.
아뢰어 불충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하였으
이것을 본 선생은 병졸을 소집하여 변복한
며 임금은 부득이 선생을 좌천시키시어 사
일당 한 명을 잡아 국문(鞠問)하니 조원정이
공복야(司空僕耶)로 삼으니 이를 지켜본 여
석인(石隣), 석충(石沖)과 비복을 보낸 것을
러 관원들이 애석해 하였으며 사공이 되어
알아내어 그 일당 30여 명을 처형하였다.
녹을 받지 않아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청렴
선생의 충성과 굳은 절개, 청렴결백함을
결백함에 탄복하였다. 명종 10년에 태자소
신조로 음식과 의복을 검소하게 하였고, 과
경(太子小卿)이 되었으며 이어 참지정사(參
거를 세 번이나 맡아서 명사만을 선출하여
知政事)가 되었고 다시 태위(太尉)가 되었
현명한 재상으로 불려졌다.
다. 명종 15년에는 판례부사(判禮部事)로 당
선생은 명종 19년에 68세를 일기로 유구
시 한문준이 반열에 둘째요 선생이 다음이
추계에서 타계하였으며 명종 사당에 배향되
었다. 최세보의 윗자리에 있게된 선생은 자
었고 이조 태종은 충절충숙 훈업이 천추에
리를 양보하여 최세보를 병판부에 추대하였
빛난다고 숭의전에 배향하였고, 묘하에 고
으나 굳이 사양하여 선생이 병판부에 오르
간원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현재 유구읍
니 세상 사람들이 선생의 인격에 감동하였
추계리에 고간원이 있어 선생의 뜻과 업적
다. 그 후 선생은 상장군 최세보와 같이 국
을 기리고 있다.
사를 논하여「의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책
公州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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