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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문화원
문화의 향기를 담아내는 소담옹기
(申敏一, 1576~1650)의 4세손이고 아버지는 신박(申?)이다. 31세 때인 1768년(영조
44)에 문과(대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사간원 정언(정6품)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릴 때부터 효행이 뛰어났다. 부모님이 편찮아지자 정성을
다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오골계를 구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오골계가 스스로 날
아 들어왔다. 또 부모가 돌아가신 뒤 산소에 불이 나자 울면서 불을 끄고 있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불이 꺼졌다. 당시 인근 사람들이 이런 일을 기이하게 여기며 효성에 감동
한 까닭이라 생각하고 연명으로 관부에 청원서를 올려 포상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29] 열녀 평산 신씨 <申氏>
남편대신 아프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조선 후기의 열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관리로 있던 고세진의 부인이다.
어릴 때부터 유순하고 영특했으며 부모님께 순종하여 착한 사람으로 알려져 왔다. 결혼
한 후에도 단정하고 부지런했으며 시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집안의 화목에 정성을 다했
다. 하인들도 사랑으로 대하니 하인들과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남편이
얼마 가지 않아서 병이 들어서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신씨는 매일 밤 목욕재계하고‘천지신명이시
여, 남편 대신 제가 아프도록 해주시옵소서.’
라고 끝없이 기도했지만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떴다. 남편의 시신을 염한 뒤에 슬픔을 누르지
못하고 끝내는 사람들이 잠든 틈에 남편의 허
리띠로 목을 매어 자살하니 신씨의 나이 28세
였다. 문중에서는 신씨의 죽음을 갸륵하게 여겨
서남편의무덤에합장해주었다.
그 후 암행어사가 아산 지방을 순회할 때 고을
의 선비들이 이런 사실을 보고하니 어사가 임
금께 아뢰었다. 1848년(헌종 14)에 정려가
내린다는 명이 있었고 1861년(철종 12) 정문
(정려각)을 세웠다. 아산시 영인면 아산 2리
에 열녀비와 함께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열녀 신씨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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