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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의령남씨 남발
| 南撥
<1561년(명종 16년)~1646년(인조 24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의령남씨(宜寧南氏) 12세이며 충간공파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입향조이다.
개국일등공신 영의정 남재(南在)의 8세손이며 사평(司評)을 지낸 설애(雪崖) 남언진(南彦縝)의 아들
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서성군(西城君) 이숭조(李崇祖)의 딸이다.
자는 공제(公濟)이고 호는 화은(華隱)이다. 부인이 예안 이씨 온양 입향조인 이사종(李嗣宗)의 아들
정악원정 단(
)의 딸이었기 때문에 이를 인연으로 송악 지역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실제로는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우계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88년(선조 21)에 생원과에 합격하고 의금부도
사·종묘서직장·사헌부감찰·보은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에 문과에 급제한 뒤 공
조좌랑에 제수되었고 춘방(春坊-세자시강원)·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를 거쳐 통정대부 우승지
(右承旨-정3품)에 이르렀다. 1612년(광해군 4)에 서장관으로, 1619년(광해군 11년)에는 성절사(聖節
使)로 두 차례나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관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
으나 얼마 뒤에 풀려났고 다시 종묘서령·군자감정·통례원정·상의원정 등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일찍이 온양 설애산(설화산) 아래(송악 역촌리)에 집을 짓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계속 거주
하다가 86세에 졸하였고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진사로서 봉사(奉事)을 역임하고 병조참판에 추증된
아들 엽(煌-또는“황”
)과 손자 두성(斗星)·유성(有星)·필성(弼星)·몽성(夢星)·오성(五星)을 두었
다. 손자 5형제 중 유성·필성·몽성 3형제가 문과, 오성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묘는 태안 삭선리 금
굴산 문중 묘지에 있으며 증손 남구만(南九萬)이 찬한 비가 있다.
[36] 의령남씨 남열
| 南悅
<? ~ 1464년(세조10년)>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의령남씨(宜寧南氏)씨 9세이며 충경공파-직제학공파-호군공파 아산시 지
역, 염치읍 방현리 쇠일 마을 입향조이다. 탕정면 명암리에 거주하다가 현재 권곡동에 살고 있는 후
손 25세(世) 남정우(南正祐, 68세)씨의 16대조이다.
고조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에 오르고 의령부원군에 봉해진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이고
증조는 병조의랑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증직된 남경문(南景文)이며 조부는 문과급제 후 예문관 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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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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