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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山의
공신옹주(恭愼翁主)(?)
공신옹주는조선성종의셋째딸로서귀인엄씨
(嚴氏)소생이다.남편은한명회(韓明澮)의손자
청녕위(淸寧尉)한경침(韓景琛)이다.
갑자사화(연산군 10) 때에 연산군은 생모 윤씨
(尹氏) 폐위에 공신옹주의 어머니 엄씨가 관여
하였다하여사사하고,그딸인공신옹주는그작
위를박탈하고노예신분으로만들었다.
옹주는유배되는날몰래그남편의신주를품고
공신옹주 정려문 (대술면 마전리)
가서가시나무울타리속에숨겨놓고아침,저녁
으로제사지내고끓인죽이나풀열매에이르기까지반드시천신(薦新)한뒤에먹었다고한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 2년(1507)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고, 중종 10년(1515)에는
옹주가 지친(至親)의 귀한 몸으로 절행이 뛰어났음에도 삼강행실속록(三綱行實續錄)에 기
록되지않았던바찬집청(撰集廳)에문의하여추가하게 하였다.중종10년6월에쌀과콩30
석을하사하였고13년5월에도쌀과콩50곡(斛)을하사하였다.
또한 중종 10년 5월에는 옹주의 정문이 기울어지고 무너진 것을 고치는 일을 논의하였다.
중종16년(1521)10월에는옹주가연산군7년(1501)에상언하여연산군9년(1503)에인천
(仁川)삼목도(三木島)를떼어받게되었으나이듬해귀양갔으므로호조(戶曹)에방계(防
啓)하였고,옹주가석방되어돌아온지오래지않아즉시추심하지못하였는데,옹주가절도
를지키므로도로줌이합당하다는전교를내리었다.
공신옹주의정려문은예산군대술면마전리(중삼마을)에세워져있다.옹주는혈연이없어
청성군(靑城君) 찬(瓚)을입후(入後)하였으나계승되지않아절손이되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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