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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넷째, 그 문장이 비범하고 간결하면서도 진실하며 충?효?신?의가 간곡하게 담긴 내용을 정성을 다
하여 쓴 충무공의 고백인 점 다섯째, 공이 손수 쓴 글씨인 만큼 필적에 예술적 가치가 있고 여섯째,
공이 가는 곳에 승리가 있고 정의가 있었으며 민중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일기는 난중 7년
동안 공의 피와 눈물이 헤아릴 수 없이 배인 것이며 쉴새 없이 빗발치는 총탄과 화살 속에서 왜적과
싸우면서 틈틈이 계속하여 집필한 것으로 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보존하여 400여년을 간직해 온 것이
다. 현재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현재의 인현동)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덕수(
), 부친은 정( )이다.
어릴 때 아산으로 옮겨 살아 종가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이 종가에는 이충무공의 친필, 난중일기,
장계( 啓), 우물, 활터 등이 보존되어 왔다. 조선 숙종 30년(1704)에 아산의 유생들이 사당 세우기를
상소하여 숙종 32년에 조정이 허락하여 사당을 세웠고 숙종33년에 국왕이 현충사(
)로 사액(
)하였다. 그 후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훼철(
)되었다가 1932년에 이충무공유적보존회와 동아일보
사가 중심이 되어 전 국민의 성금으로 현충사를 복원하였다. 1962년 충남도지사가 이충무공 탄신기념
사업위원장이 되어 경내를 확장하고 유물전시관 등을 신축 하였다. 1966년 박정희(
) 대통령이
성역화를 계획하여 본전(
)등을 건축하고 1967년 현충사를 사적 제155호로 지정하였다. 1967년
이충무공 제422회 탄신기념 및 성역화 준공식을 거행 하였는데 한식팔작(
)집 본전과 내삼문,
홍삼문, 정려(
), 정문, 고택, 충무정, 활터, 유물전시관, 그 외의 부대시설을 갖추면서 주변을 조경
하여 민족의 성웅인 이충무공의 유허를 완전히 성역화
하였다.
? 난중일기(?
記) : 7책은 난이 일어난 다음 달
부터 시작되어 중간에 약간 끊어진 데가 있으나
공이 전사한 전달까지의 군중일기(軍
記)이고
후에 충무공전서에 전해진 난중일기의 친필초본
이다. 그런데 전서(
)의 난중일기와 비교해
보면 초본(
)에서 전서에 생략된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충무공의 시취(
)가 넘치는 일상생활과
료우(
), 친족과의 왕래, 수군통제에 관한 비책 등 중요한 기사가 있다.
? 임진장초(
) : 표지에는 임진장초라는 제목을 붙이고 오른쪽위에는 만역(
)20년이라고
쓰여 있으며 지면에는 여러 곳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
)이라는 주인
)이 찍혀 있다. 이것은 공이 보고하고 군무에 대하여 지령을 청한 계달(啓 )의 글을 필록
)시킨 담록이다. 이것은 전서에 수록한 것보다 훨씬 상세한 곳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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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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